<혐오하는 민주주의>를 읽고
노리나 허츠의 <고립의 시대>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현대 사회는 사회적 고립과 외로움이라는 고질병을 안고 있다. 외로움은 사회적 고립이나 공동체적 유대의 결핍으로만 초래되지 않는다. 남들이 내 말을 들어주거나 이해해주지 않을 때도 우리는 외로움을 느낀다.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 칼 융의 통찰처럼 말이다. "외로움은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중요해 보이는 것을 남과 소통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관점을 남들이 인정해주지 않을 때 느낀다." <고립의 시대> 참고
이런 감정들을 느끼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커뮤니티의 실종이다. 예전에는 동네에서 종교 단체에서 동창 모임에서와 같이 다양한 커뮤니티가 있었다. 오프라인보다 온라인에서 생활하는 시간이나 편리함이 증가하면서 상대적으로 오프라인 모임이 축소되어 지금은 사멸 직전까지 왔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기 때문에 어떤 단체에 소속되거나 소속되길 원한다. 오프라인에서 해오던 역할이 이제 온라인으로 옮겨간 것이다.
1장에서 다루는 현상으로서의 팬덤 정치 문제는 바로 외로움의 결과다. '문자 행동'이라는 꽤나 효과적이라는 경험으로부터 자신감을 얻는다고 말한다(p.33). 자극적인 언어로 구성된 문자에 답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문자 행동'을 통해 누군가와 소통할 수 있고 그로 인해 효능감까지 얻는다니 외로움을 극복하기에 충분할 수 있다.
외로움을 느끼고 소외됐다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비중이 높은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팬덤 정치에 참여하는 행위를 통해 대안적 커뮤니티를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보통 일베들의 시대>에서 말했던 대안적 커뮤니티의 형태가 떠오른다. 여기에서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순 없으니 궁금한 분은 책을 꼭 읽어보길 권하며 그에 대한 글 링크를 살포시 적어본다. https://brunch.co.kr/@yjr01/97
고립된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소통이 부재한 상황일 수 있다. '문자 행동'을 통한 연결감은 일시적으로 얻을 수 있지만 장기간 지속되긴 힘들다. 무엇보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의 소통이 필요하다. 쉽게 어떤 이야기를 할 상대가 없기 때문에 타자에 대한 혐오를 통해 혼자라는 기분을 달래면서 "자기규정의 수단"을 획득할 수 있게 된다(<고립의 시대> 참고). 혐오를 표출하면서 공고한 커뮤니티의 일원이 될 수 있는거다.
그렇게 만들어진 커뮤니티는 폐쇄적일 수밖에 없다. 누군가를 혐오하는 표현이 사회적으로 정당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실제 수면 위로 드러난 혐오는 사회적 갈등의 수준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정당하다고 판단되는 경우다. 반대로 혐오의 표현이 아직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지 않은 경우도 많다. 그런 폐쇄적 커뮤니티가 드러난 사례가 바로 딥페이크 범죄다. 혐오를 동반한 범죄라는 사실을 인지하기 때문에 폐쇄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물론 혐오라는 감정이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 포함하며 폐쇄적 커뮤니티의 사례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언급했다.
이 책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초연결 사회를 만들 수 있는 네트워크의 발달로(p.105) 폐쇄성과 고립 두 가지가 같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좋은 점도 많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피해 사례가 나오고 있어 외국에서는 특정 연령대는 초연결을 끊는 법안을 만들고 있다. 혐오를 표출해도 된다는 이유 중에 표현의 자유를 끌고 오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유라는 단어를 잘못 해석한 사례일 것이다.
현대는 조선시대와 다르게 신분제가 없다. 그렇지만 주변에서 듣고 배우게 되는 건 다르다. 현대에 계급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언론과 미디어에 노출되는 수많은 계급적 사고방식이 있다. 좋은 대학과 금전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을 잘된 사례로만 보여주며 살아가는데 하나의 길만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한다. 다양성이 결여된 환경은 대부분의 길이 실패이며 다시는 일어설 수 없다는 좌절감을 안겨줄 뿐이다. 좌절된 사람들은 이후 고립될 가능성이 커진다. 게다가 수능을 전후로 더 이상의 학습을 중단하는 현상이 가장 최악이다. 시험을 위한 학습을 했지 살아가는데 학습이 필요하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간다. 이후 파편적인 지식 습득으로 맥락없는 주장을 내제화해 계급적 박탈감을 상대를 끌어내리며 쟁취하고 싶어한다. 물론 이런 주장은 문제가 되는 상황에만 해당된다.
한 마디로 전반적인 교육 시스템과 언론,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단일화된 사회구조와 성공 스토리가 문제라는 거다. 계급 전쟁에 뛰어들어 쟁취하지 못하면 낙오자가 되고 이후 계급을 높이려면 상대방을 끌어내리는 것밖에 방법이 없어지는 것이다. 이로인해 팬덤 정치가 나오게 된다고 생각한다(p.120).
고독해봐야 한다. 김연수 작가의 문장을 참고하고 싶다. 현대 사회의 비극 중 하나는 바로 바쁨이다. 쉴새없이 시간을 보내며 살기 위해 발버둥 치지만 점점 제자리에서 구덩이를 파고 있는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보인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거나 사색에 잠길 시간을 스스로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고립된 삶으로 들어가버리는 것은 아닐까 자문해봐야한다. 고립되기 전에 고독해봐야 한다는 이야기가 그래서 적절하다고 느껴진다. 자신과의 시간을 충분히 보낼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준다면 고립이 줄어들지 않을까.
'고립은 자신에 대한 애착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타인을 멸시하기에 비극을 초래한다. 하지만 고독은 우리 자신으로부터도 이탈하는 것이다. 이 이탈을 통해 각 존재는 공통의 기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 p.231 <이토록 평범한 미래> 중에서
경제적 집중을 줄여야 한다. 주권이 쪼개지고 분열되면 강해지는 것은 사회 속 강자 집단이고, 커지는 것은 돈의 힘, 심화되는 것은 경제적 불평등이라고 했다(p.244). 실제 1938년 루스벨트 연설 내용을 보면 '개인적인 권력이 민주적 국가 자체보다 더 강해지는 지점에 이르는 것을 참으면 민주주의의 자유는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라고 말한다. 이제라도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려는 노력과 그로 인한 영향이 크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1938년 루스벨트의 의회 연설 내용이 그다음 해에 <아메리카이코노믹리뷰>라는 저널에 실린다. '개인적인 권력이 민주적 국가 자체보다 더 강해지는 지점에 이르는 것을 참으면 민주주의의 자유는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루스벨트는 경제적 집중이 기본적으로 민주주의를 저해하는 위협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많은 정책을 통해 미국의 경제력 집중, 재벌 구조를 없애버리는 정책을 펴나갔고 그것이 바로 뉴딜 정책의 핵심이었다. p.189 <지속불가능 대한민국>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