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모 간담회에 참석해주세요
미국에서 1년 살기
학교에서 이메일을 받을 때마다 공지가 되어 있던 'Literacy Night'
'뭐지...?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밤? 교양 있는 밤?'
내가 알고 있는 단어의 뜻으로 해석하니 당최 뭘 하는 행사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학교에 가야 하는 날짜는 점점 다가오는데 적어도 뭔지는 알고 가야겠다 싶어 스쿨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용기를 내어 옆에 있는 인도인 엄마들에게 물어봤다.
아이들을 기다리는 동안 항상 같은 얼굴들을 마주치기 때문에 이제는 어느 정도 낯이 익은 사람들이었다.
처음엔 다들 비슷한 헤어스타일과 옷차림이라 구별이 잘 안 됐는데, 인사를 하다 보니 눈에 익은 몇몇이 있었다.
'Hi'외에 정식으로 말을 거는 건 처음이라 머릿속으로 문장을 몇 번이고 되뇌다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무리 지어 있던 엄마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거들며 자기가 알고 있는 걸 얘기해 주기 시작했다.
1대 1도 힘든데 1대 6이라니.
듣기 평가 난이도도 이 정도는 처음인 데다가 인도억양이 너무나 강력해서 어떤 엄마가 말하는 건 지금 이게 영어인지 인도어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간신히 알아듣는 말들을 종합해 보니 'Literacy Night'은 선생님 만나서 애들 어떻게 공부하는지 듣고 궁금한 점은 질문하는 시간이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1학기 학부모 간담회' 정도일까?
보통 'Conference day'라고 하는데, 우리 학교는 각 행사나 이벤트마다 좀 특이한 이름을 붙이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모든 게 처음인 나로서는 제목만 봐서는 어떤 행사인지 추측하기 힘든 이벤트들이 꽤 많았다.
(괄호 열고 컨퍼런스데이라고 써주면 좋을 텐데.)
전 학년이 동시에 진행되기 때문에 나는 둘째아이반으로 남편은 첫째아이반으로 신청했다.
간담회는 저녁 6시부터 시작이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엄마들의 수만큼 아빠들도 많이 보였다.
하루종일 학교에 있다가 돌아와 놓고, 저녁을 먹고 다시 학교로 간 아이들은 친구들하고 또 만나 놀 수 있다는 생각에 신이 나 있었다.
'이젠 친구들하고 노는 게 안 불편하고 재밌구나.'
들떠있는 아이들의 모습에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학부모 등록을 하기 위해 교실 앞에서 기다리며 벽에 붙어있는 활동지들을 구경하다 보니 유난히 글보다 그림에 한껏 공들인 작품 하나가 눈에 띄었다.
역시나 둘째 아이 작품이었다.
큼지막한 글씨로 한 페이지를 끝까지 다 채웠다는 게 너무나 기특해서 자세히 보니 'I went to the mountains in Korea.'라고 선생님이 써주신 걸 그대로 한번 써본 거였다.
'하긴, ABCD밖에 모르던 아이에게 한 달 만에 글짓기를 기대하는 건 무리지.'
비록 짤막한 한 문장이었지만 가장 또박또박 쓴 글씨와 디테일한 그림을 칭찬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교실 앞 복도는 서로 인사하며 담소를 나누는 학부모들과 아이들로 붐볐다.
저녁시간 이후라 그런지 부모가 모두 참석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우리 아파트만 봐도 인도인의 비율이 상당히 높고 아이들을 통해 학교에도 인도아이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보니 선생님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인도인인 것 같았다.
굉장히 첫인상이 좋았던 담임선생님은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로 반겨주셨다.
그동안 아이에게 구글번역기를 사용하여 중요한 사항들을 전해주시고 아이가 잘 적응할 수 있게 도와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지만 그저 짧은 인사만 나누고 다음 사람이 등록하도록 자리를 비켜줬다.
언제쯤이면 하고 싶은 말을 자신 있게 내뱉을 수 있을까...?
학부모들이 설명을 듣는 동안 아이들은 따로 모여 책을 읽거나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는 것 같았다.
내가 교실까지 데려다준다고 해도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안다며 어느새 친구들과 저 멀리 달려가 버리는 아이를 보니 왠지 뭉클했다.
'이제 진짜 적응이 되었구나.'
1학년인 둘째아이반의 간담회는 선생님들이 앞에 나와서 교과과정이나 수업활동들에 대해 설명하고 부모님들의 질문을 받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물론 난 특별히 궁금한 것도 없고 질문할 용기는 더더욱 없기에 다른 학부모들이 질문하는 내용만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었다.
1학년 학부모의 마음이 다 비슷비슷해서 그런지, 내가 질문하고 싶었던 점만 쏙쏙 골라 질문해 주는 학부모들 덕에 있는지도 몰랐던 나의 궁금증은 모두 해소되었다.
간담회가 모두 끝난 후에 만난 남편은 몹시 지쳐 보였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5학년인 첫째아이반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간담회가 진행된 것 같았다.
아이들이 어떻게 수업을 하는지 부모들이 직접 체험을 해봐야 한다며 그룹을 지어 토론을 하고, 토론하다가 의견에 따라 나뉜 그룹별로 또 토론하고, 예시를 들어 설득하며 끝없는 대화를 했다는 것이다.
2시간 동안 완전 혼이 나갔다가 돌아왔다는 남편은 "뭔 초등학교 수업이 대학교 수업보다 힘든 것 같아."라며 다음 간담회 때는 자기가 둘째아이반으로 가겠다고 했다.
친구들과 신나게 놀았던지 잔뜩 상기된 얼굴로 아이들이 돌아왔다.
첫째 아이는 그럭저럭 대화가 되는 것 같았지만 둘째 아이는 눈치가 빨라서 알아듣기는 하는 것 같은데 입은 여전히 절대 안 떼는 것 같았다.
그래도 저렇게 신나게 놀이가 가능하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아직 초등이라 그런지 같은 반 친구들이 다 친절하고 배려도 많이 해주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역시 애들은 어른보다 적응을 더 잘하는구나.'
복도 벽에 붙은 포스터를 보니 다음 달에도 행사가 있는 것 같았다.
'또 학교에 와야 하는구나. 북페어라면 별다른 대화를 할 필요는 없겠지?'
아이들 학교에 다녀오거나 선생님과 통화를 하고 나면 영어공부에 대한 의지가 급 상승되곤 한다.
이제는 알아듣는 게 문제가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정확히 표현하고 나의 마음을 전하고 싶은 욕구가 너무나 크다.
말하지 않으니 관계가 전혀 진전되지 않고 답답한 느낌만 커진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건 초코파이밖에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