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빛 말고 최악의 결과를 깔아 놓는 이유
화요일 오전, 피드백을 기다리고 있었다. 휴일 없이 꼬박 2주 넘게 투자한 일이었다. 회신이 오기를 기다리며 초조하게 카톡 알람 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그때였다.
띵동~
작가님! 모두 컨펌 완료라고 합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클라이언트사 헤드의 최종 OK까지 받았다는 연락이었다. 처음 해보는 종류의 일이었고, 처음 손발을 맞추는 사람이었다. 제안을 받았을 때는 덥석 수락하긴 했는데, 하겠다고 말한 그 순간 이후부터 점점 두려웠다. ’ 내가 이걸 할 수 있을까?‘ 끝없는 의심과 불안이 나를 괴롭혔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언제나 그렇듯) 마감이 빠듯한 일정이었고, 불안에 떨며 초조해할 시간이 많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일단 마감까지 100m 단거리 달리기 선수처럼 달려야 했다. 자료를 찾고, 아이디어를 짜내고,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맞는 결과물을 다듬는 내내 생각했다.
잘 되면 좋은 거고, 안되면 잘리기밖에 더 하겠어? 그렇다면 계획대로 망해볼까?
프리랜서의 단점은 선택을 받아야 일을 할 수 있다는 거고, 장점 또한 내가 그 일을 할지 말지 선택할 수 있다는 거다. 이유가 뭐든 클라이언트는 나를 택했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결과물을 내기 위해 노력했다. 과거의 나는 내가 쏟아부은 노력이 수포가 됐을 때 와르르 무너졌다. 쓸모없는 인간이 된 거 같고, 상대가 나를 어떻게 볼지 두려웠다. 일로 만난 사이니까 제대로 일을 하지 않으면 내게는 두 번의 기회가 없을 거로 생각했다. 내 노력과 기대가 컸으니 결과는 언제나 핑크빛으로 그렸다. 혹시라도 최악의 결과를 상상이라도 하면 부정 탈까 두려워 실패는 상상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내 노력이나 실력에 상관없이 일은 흘러간다. 내가 아무리 좋은 결과물을 가져가도 회사 내외부의 사정으로 하루아침에 프로젝트가 셔터를 내리기도 한다. 또 별 기대 없이 시간에 쫓겨 내놓은 결과물도 의외로 좋은 반응을 얻기도 한다. 정리하자면 내 최선의 노력이 꼭 좋은 결과로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다는 뜻이다. 그걸 몰랐던 과거의 나는 늘 좋은 결과만을 바랐다. 그러니 다음 생의 에너지까지 박박 끌어다 쓰다가 결국 나자빠졌다.
그렇게 몇 년을 헤맨 후 핑크빛 결과만 상상하는 버릇을 버렸다. 내가 후회하지 않을 만큼만 노력하고, 결과는 하늘의 몫이라고 슬쩍 떠넘겨 버린다. 좋지 않은 결과를 얻더라도 경험치 +1만큼 쌓인 거라 생각한다. 결과만 보고 망했다고 쉽게 말하는 사람 천지인 세상에 나라도 내 멘털을 챙기지 않으면 그 누구도 챙겨주지 않으니까. 망할 거라고 일단 최악의 상황을 깔고 시작하면 두려울 게 없다. 부담감도 없고 기대도 없다. 계획한대로 망하면 마음의 준비를 했기 때문에 실망할 일도 없다. 큰 기대는 큰 실망을 가져오지만 적당한 기대는 뭐든 다 잘 된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든다. 기대치가 낮으면 행복 지수가 올라간다.
이번 프로젝트가 망할 걸 계획했던 쫄보는 의외의 결과를 받아 들었다. 컨펌 과정은 참기름 바른 가래떡처럼 매끈하게 이어졌다. ’ 수정 없이 바로 이렇게 끝난다고?‘ 싶어 담당자에게 원래 클라이언트가 이렇게 무난한 분이냐고 물었다. 담당자 역시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고 했다. 처음엔 둘 다 갸우뚱했는데 나야 수정 없어서 좋았고, 담당자 역시 빨리 일을 마무리할 수 있어서 좋아했다. 하던 일에서 손을 떼는 최악의 상황을 생각했던 난 논스톱 쾌속 컨펌이라는 예상 밖의 결과를 얻었다.
불안과 괴로움에 시달리는 이유는 기대가 크기 때문이다. 노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세상에서 가진 무기가 노력뿐인 사람의 선택지는 많지 않다. 실망하거나 좌절하거나. 매번 그 둘 사이만 오가던 내가 그 사이를 비집고 조그만 선택지를 하나 더 찾았다. 잃을 게 없으면 용감해지는 것처럼 ’ 망함’이라는 최악의 결과를 깔아 두고 나면 그다음은 한결 쉬워진다. 여전히 개복치력 최상급이지만 이렇게라도 숨만 쉬어도 부서지는 멘털을 부여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