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 한 그릇으로 떠나는 안동 여행
원래도 사람이 많았지만 관광객 바가지 논란으로 시끄러운 광장시장의 대체재로 급부상한 경동시장. 동시에 2024년을 강타한 파워 콘텐츠 <흑백 요리사> 출연자가 운영하는 매장이 있다는 사실에 경동시장은 어르신들의 핫플을 넘어 전 국민적 힙플이 됐다. 열기가 식기를 기다리다가 사라진 얼마 전, 봄나물 구경하러 경동시장에 갔다가 지하 던전에 있는 이모카세의 <안동집>으로 향했다.
주말에는 감히 갈 엄두도 못 냈다. 점심시간 식사 전쟁에도 참전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평일 점심 피크가 지난 무렵 조심스럽게 신관 지하로 향했다. 줄이 길면 지체 없이 후퇴하자며 같이 간 이들의 마음마저 단속했다. 아무리 천상의 맛집이래도 1~2시간씩 기다려서 먹을 만큼의 체력도, 인내심도 없는 우리는 ’ 낡은이‘니까.
어르신들이 주 손님 층인 크고 작은 식당들이 모여 있는 신관 지하. 멀리서도 <안동집>을 알아볼 수 있었다. 주변 가게들이 한가하거나 아예 집기가 다 빠진 빈 매장인 분위기와 달리 그곳만 북적이고 있었다. 마치 사막 한가운데의 오아시스처럼 활기가 넘쳤다. 간이 주방을 중심으로 빙 둘러 다찌 테이블이 있었고 손님이 빼곡히 앉아 열심히 자기 앞의 음식에 집중하고 있었다. 한복 차림에 쪽 찐 머리, 성난 갈매기 눈썹에 빨간 입술이 시그니처인 이모카세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매스컴에서 종종 얼굴을 비추던 아드님과 직원들이 각자 자리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오~ 럭키! 대기 줄로 가보니 우리 앞에는 한 팀뿐이었다. 5분 내외면 자리가 날 거라는 직원의 말에 기다리기로 하고 메뉴판을 둘러봤다. 이미 미디어에서 수없이 본 메뉴들이었다. 메뉴판을 치우고 손님들의 표정을 구경했다. 설렘과 인정. 얼굴에는 두 단어가 가득했다. 5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직원은 간이 주방 뒤쪽 깨끗한 매장 쪽으로 우리를 불렀다. 이 공간이 <흑백 요리사> 방송 전부터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매장은 깔끔했고, 직원들은 손이 빨랐다.
자리에 앉자마자 수육 1개, 손국시 1개, 배추전 1개. 이렇게 주문했다. 컵에 물을 따르자 알배추와 된장, 김치가 나왔다. 숟가락을 놓자 수육과 배추전이 테이블에 도착했다. 이게 바로 K-패스트푸드인가? 맥도날드보다 빠른 속도다. 메뉴가 한정적이고, 손님들이 끊임없이 들이닥치니 만들기 무섭게 소진되기 때문에 가능한 속도였다.
막걸리를 부르는 조합이지만 아직 남은 일정이 많아 술 대신 물을 한 잔 들이켜고, 수육을 한 점 집었다. 아무것도 찍지 않고 순결한 수육을 입에 넣었다. 따끈, 부들, 촉촉, 고소한 고기다. 간이 적당히 있어 뭘 더하지 않아도 간간하다. 서빙하던 직원의 추천대로 야들야들한 알 배추에 된장을 넣고 쌈으로도 먹으니, 입안이 프레시해졌다. 다음은 배추전. 경상도 쪽에서는 흔하게 먹는다는데 충청도 출신 부모님과 경기도에서 사는 나는 성인이 된 후에 처음 배추전이라는 세계를 알았다. 배추를 몇 겹 겹쳐서 전을 부쳤는데도 기술이 좋은지 바삭함이 살아있었다. 기름이 많이 들어갔는데도 신선한 배추 맛이 강해 느끼하지 않았다.
배추전과 수육으로 애피타이저 삼아 즐기고 있을 때, 드디어 이 집의 대표 메뉴 손국시가 도착했다. 밀가루로 만든 칼국수가 익숙한 사람 입에 콩가루가 많이 들어간 면은 다소 신기한 경험이었다. 마치 메밀국수처럼 찰기 없이 뚝뚝 끊기는 식감이 재미있었다. 콩가루 함량이 높아서인지 면 색깔도 밀가루 면보다 노란색을 띠고, 두부면을 먹는 기분이었다. 손국시 역시 심심한 국물 위에 배추가 인심 좋게 들어가 있었다. 고층 빌딩들이 늘어선 강남이나 삼청동, 서촌 근처 고풍스러운 한식당에서 팔았다면 2만 원은 족히 줬을 국수였다. 전통시장 낡은 건물, 그것도 지하 한쪽에 있으니 가능한 가격일까? 임대료도 싸고, 신선하고 저렴한 재료 수급도 쉽고, 오는 손님도 시장을 오가는 상인이나 서민들 일 테니 만 원짜리 한 장으로도 정성 가득한 국수를 맛볼 수 있었다.
콩가루 반죽으로 만든 국수 한 그릇으로 서울 한복판 시장 한 귀퉁이에서 잠시나마 안동 여행을 한 기분이었다. 뭔가 대감집 종손 며느리 손끝에서 나왔을 거 같은 맛과 이미지 메이킹 덕분일지 모르겠다. 먹는 내내 안동은 어떤 곳일까? 상상했다. 손국시가 점점 뱃속을 채우는 동안 머릿속에서는 미디어에서 본 안동의 모습이 재생됐다. 배를 두드리며 안동집을 나오니 안동에 가보고 싶어졌다. 태어나서 한 번도 밟아 보지 못한 땅이지만 안동집 국시 한 그릇으로 조금 더 가까워진 기분이다. 이렇게 음식은 희한한 마력을 가지고 있다. 잘 만든 음식 한 그릇을 먹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마음을 품게 만들기도 하고, 또 낯선 곳으로 떠날 용기를 채워주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