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은 곧 시작
30년 넘게 영어를 배웠지만 막상 미국에 와보니 실제 영어는 책 속의 그것과 사뭇 달랐다. 아예 모르는건 그렇다쳐도 분명 알고 있는 단어인데 내가 전혀 예상도 못한 상황에서 쓰이는 말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예컨대 '로션을 바른다'고 할 때 동사를 Apply를 쓴다든지 썬크림을 Sunscreen이라고 한다든지 "나 지금 가고있어!"를 I'm going 이 아닌 I'm coming이라고 하는 것 등이다. 수업이나 강의가 끝나고 오늘의 Lesson(교훈)이 뭐였지? 라고 물어볼땐 lesson이 아닌 takeaway란 단어를 쓰는 것도 신기했다. 이런 놀라움들이 하나씩 쌓일 때마다 뭔가 새로운 발견을 한 것 같아 므흣했다.
그 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Commencement라는 단어다. 내게 '졸업'과 관련된 단어는 온리 Graduation 하나 뿐이었는데 이곳에서 졸업식을 그 누구도 Graduation day라고 부르지 않았다. 대신 Commencement day 혹은 Commencement Ceremony라고 표현했다. 커멘스먼트? 고2때 단어장 어딘가에서 본 것 같긴 한데 뜻이 잘 생각이 안났다. 찾아보니.
시작, 개시
학위 수여식, 졸업식
졸업식은 지긋지긋한 과제와 학점, 학교생활에서 벗어나 드디어 꽃길만 걷을 것만 같은 그런 기쁘고도 행복한 날이지만, 반대로 또 다른 시작이기도 한 날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작이란 뜻을 가진 commencement를 졸업식으로 부르는건 나름의 의미를 가진다.
그러고보면 나는 초딩 6년, 중고딩 6년을 이사 한 번 하지 않고 한 집에서 모두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곳으로 다녔는데 고 1정도때였나. 정말이지 칼로 찢어도 절대 안찢어질 것 같은, 질기디 질긴 교복을 입고 천근만근 무거운 책가방을 멘 채 걸어가면서 문득 '아...도대체 이놈의 지긋지긋한 학창시절은 언제쯤 끝날까'라고 말했던게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그 이후 기억들은 희미하고 그 다음으로 생생한 장면이 2002년도 대학교 1학년 한일월드컵으로 넘어가는 걸 보면 내 12년간의 학창시절은 불현듯 끝나버린 것만 같은 느낌이다. 부직포같던 교복마저도 그립다. 왜 죽기 전에는 자신의 인생이 필름처럼 장면 장면으로 주르르륵 머릿속에 떠오른다고 하지 않던가. 나는 평소에도 의미 찾기나 기억을 꾹꾹 눌러담는걸 좋아하는데 이런 내게도 끝과 시작은 늘 불현듯 찾아온다.
은행을 관두고 인생 최초로 생백수 생활을 하며 두려움과 불안함에 떨었던 취준생 시절, 주구장창 떨어지던 언론고시. 그 시간들은 분명 아주아주 느리고 긴 필름이었다. 근데 그토록 바랐던 기자가 된 후 지난 10년은 사실 인생으로 따지자면 일과 결혼, 출산 등 굵직한 사건들 투성이였는데 내 의식 속에선 그냥 휘리리리릭 빨리감기한 느낌으로 흐른다.
그리고 미국. 자의가 아니었고 그렇기에 마음의 준비를 채 하기도 전에 비행기를 탔다. 여자로서, 엄마로서, 아내로서, 직업인으로서, 이방인으로서 그 전까지의 삶과 비교할 때 많는걸 희생하고 참아내야 하는 삶이 참으로 버거웠다. 하지만 곧 이 삶도 끝이 보인다는 생각을 하니 아쉬움이 남는걸 보면 참 나는 어쩔 수 없는 어리석은 인간이다. 에이쉬ㅋ
인생의 그 어떤 터널을 지나고 있더라도 불평불만만 늘어놓기보단 그 상황이 자신에게 주는 의미를 알고 감사해야 한다는 목사님 말씀이 오늘 따라 뼈를 때린다. 끝과 시작은 늘 불현듯 찾아오기에 내 앞에 주어진 매일을 신나고 고맙게 살아보자는 하루의 다짐. 오늘의 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