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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쏭쏭계란탁 Oct 21. 2020

당연한 것들의 반란-언어편

내가 몇 살이더라..

2010년 11월 회사에 입사했을 때 일이다. 은행에 잠시 들어갔다 다시 기자셤을 쳐서 입사한 터라 나보다 어린 동기들이 꽤 있었다. 대학 동문인데 학번이 두 학번이나 밑인 동기도 있었다.


기자직군은 여타 직장인과는 다른 특징이 있는데 그건 직장 내에서 ‘님’이라는 호칭을 부르면 안된다는거다. 대통령부터 거지까지 아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직업 특성상 누구를 만나든 기선제압은 못할지언정 쫄지는 말라는 의미에서다. 선배님은 선배, 부장님은 부장, 국장님도 국장, 심지어 사장님도 사장이라 부른다. 은행원 시절 “고객님~~~”을 입에 달고 살던 나로서는 ‘님’을 뺀 호칭을 부르는게 영 어색했다.


학번이 깡패?!


특히 동기들은 나이와는 무관하게 언니, 오빠, 누나 이런 호칭이 허용되지 않았다. 무조건 이름을 부르거나 야자를 터야했다. 여기서 나의 빈정을 상하게 한 사건이 발생했으니 동문인데 나보다 두학번이나 어린, 아까 말했던 그 머리에 피도 안마른(이라고 생각했다 ㅋㅋ) 후배노무시키가 내 이름을 부르면서 야자를 트는 거였다.


“야, 너 04학번 아냐?! 나 02거든? 내가 누나자나!!”

“에이~동기끼리 그런게 어딨어~” 결국 우리의 문제는 동기들 사이에서 이슈가 됐고 결국 나의 패배로 끝났다 ㅋㅋ


이뿐만 아니다. 3월생이지만 음력생일인 2월로 신고해 학교에 빨리 들어간 ‘빠른84’인 나는 사회에 나온 후 여러모로 복잡한 상황에 속앓이를 한 적이 많다. 어디가선 83이고 어디가선 84 행세를 하다가 그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에선 늘 나땜에 족보가 꼬였다 ㅋㅋㅋ


국적도 나이도 다 다르지만 모이면 늘 즐거운 친구들.
이름이 장땡


그런데 미국에 와서 보니 그동안 나를 괴롭혔던 나이와 호칭으로 인한 고뇌와 번민들이 아주 쓰잘데기 없는 에너지 소모에 불과했다. 여기서는 직급이고 호칭이고 나이고 다 필요 없었다. 그냥 이름 부르면 땡이다. 아무도 내 나이따위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래서 실제로 미국에 오래 살고 있는 친구들은 종종 ‘내가 몇 살이었더라...’를 생각해야 한단다.

영어 선생님 어깨에 손을 올리는 용기는 어디서 나온건가 ㅋ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린 선생님 이름을 몰라도 “선생님~”만 하면 만사 오케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Mr.K, Ms.Rosenberg 등 미스터나 미즈, 미스 뒤에 성을 붙이는게 일반적이다. 이를 무시하고 그냥 Teacher~이라 부르는건 오히려 이름을 모른다고 생각해 자칫 언짢아할 수도 있다. 이름을 몰라도 김 과장님, 이 부장님으로 통하는 우리사회에서 직급을 모르면 대략 난감해지는 것과 비슷한 논리랄까.


이 얼마나 씸플한가!! 이런 언어적 특징을 가진 문화 속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다보니 의외의 수확이 있다.  그거슨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선 누군가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머릿속에서 서열로 일단 구분한 후 손위면 더 예의바르게 행동하되 밥은 얻어먹겠군. 손 아래면 일단 반말을 슬슬 섞고 밥을 사줘야겠군 다짐하는데 여기선 그냥 얄짤없이 더치다. 높임말도 없다. 교수고 엄마고 상사고 친구고 그냥 다 You고 이름 부르면 끝이다. 이 덕에 교수들과도 맞짱을 뜨고 상사와도 대등하게 디베이트가 가능한건가.


아가씨, 도련님?! 그게 뭥미?
올해 추석 때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이 뿌린 보도자료. (출처:서울시여성가족재단)

매해 명절만 되면 나오는 기사들이 있다. 바로 시가와 친정 사이 존재하는 불합리한 호칭 문제다. 대체 왜 남편의 여자형제는 아가씨고 남자형제는 도련님으로 불러야 하는지, 시댁은 댁이고 처가는 가인지를 논하는 기사들이 쏟아진다. 수년째 이 기사를 쓰는 나조차도 지겨운데 이걸 보는 사람들은 얼마나 지겨울까. 반대로 이렇게 지겹도록 말이 나오는데 또 죽자고 안고쳐지는 걸 보면 시댁이고 친정이고 나발이고 죄다 in-law로 퉁치고 이름 부르는 이동네 사람들의 언어는 정말이지 간단 명료하다. 저 기사들이 얼마나 소모적인 논쟁인가.


한국은 편리하고 미국은 편안하다


미국서 오래산 친구가 지나가는 말로 한 얘기다. 한국은 모든 분야에서 빠르고 정확하고 클릭 몇 번이면 모든게 가능한 편리한 곳이고 미국은 더럽게 느려 터지고 복장 터지는일 천지지만 남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돼 편안한 구석이 있단다.

동심의 세계 디즈니월드에서는 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두 하나가 된다.


그러고보면 남의 시선이나 관심에 그닥 신경쓰지 않는 이곳 사람들의 특징은 어쩌면 이런 언어구조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단 생각이 든다. 구조가 행동을 결정한다고 하지 않던가. 언니, 형님, 아가씨, ~씨, 형수님, 새아가 등등...같은 사람이라도 이처럼 많은 호칭이 가능한, 신경쓸게 너무 많아 편치 않은 우리네의 언어구조가 어쩐지 피곤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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