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소설/단편소설 03
새벽 5시, 서둘러 어젯밤 묵었던 압사라 앙코르 게스트하우스를 나섰다. 그곳 주인장에게 앙코르와트 유적지를 둘러보고 싶다고 말하니 그는 사람 좋은 얼굴로 자전거 하나를 선뜻 내어주며 바라이 호수를 지나 앙코르 톰 서문으로 가는 길을 일러주었다.
“ 앙코르와트 사원을 제대로 보려면 말이에요. 해가 비치는 오후에 보는 게 가장 좋대요.”
“ 어째서?”
“ 알겠지만 앙코르와트 회랑을 따라 빽빽하게 새겨져 있는 부조들이 빛을 받으면 가장 입체적으로 살아나기 때문이라고 해요. 하지만 난 동트기 전이나 해질녘의 앙코르와트가 더 맘에 들어요. 그건 앙코르와트 사원이 서쪽으로 지어진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거예요.”
그녀의 말들은 여전히 수수께끼였다.
씨엠 립 시내를 가로지르는 6번 도로를 따라 공항 방향으로 가다가, 20분 정도를 더 가니 작은 다리 하나가 나왔다. 그 다리를 지나서 우회전해서 쭉 들어가니 평화로운 호수가 나를 반기고 있었다. 전날 보았던 톤레샵 호수에 비하면 그 규모가 턱없이 작아보였지만 훨씬 더 평화롭다. 이 호수가 바로 게스트하우스 주인장이 말한 바로 그 바라이 호수겠지. 왔던 길을 한 번 뒤돌아보니 사방이 평평해서 하다못해 조그만 언덕 같은 것도 하나 찾을 수가 없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하늘로 우뚝 솟아있는 거라곤 도시의 아파트도, 쇼핑몰도 아닌 그들이 숭배하는 신을 받들기 위해 그들의 혈로 지은 사원이 유일했다.
바라이 호수를 끼고 천천히 자전거 페달을 밟으니 이름모를 사원이 하나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마주하는 첫 번째 사원. 갑자기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하고 올라왔다. 그녀도 이 사원을 보았을까? 앙코르와트 기둥에 그녀의 비밀을 털어놓기 위해 나처럼 그녀도 이 길을 지났을까? 해가 채 떠오르지 않은 이른 새벽, 천년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는 앙코르와트 사원의 여명이 뜨는 순간 그 고요함과 장엄함에 저도 모르게 앙코르와트 사원의 석상들이 말을 건네는 듯 한 착각에 빠져들었을까. 그 순한 모습에 사람들은 인간들에겐 차마 털어놓지 못한 가슴에 꽁꽁 감추어두었던 비밀 하나씩을 이 석상들에게 털어놓았을까. 그녀도 그럴 것이었다. 양조위가 그러했던 것처럼.
꼭 왕관 모양을 연상케 하는 앙코르 톰 서문에 도착했을 때에야 비로소 상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드디어 인간이 아닌 신의 세계로 들어서려는 찰나이다. 흘러내리려는 돌덩이를 양쪽에 사다리 같은 나무로 받쳐놓은 모습에 새삼 세월의 풍파에 씻겨간 옛 크메르 문명과 이 거대한 문명을 호령했던 왕의 영화를 보는 거 같아 마음 한 편이 씁쓸했다. 그럼에도 바이욘 사원에 새겨진 부조의 얼굴은 신기할 정도로 평온해보였다. 마치 살아있는 사람의 얼굴인양 미소를 띤 모습이라니. 나약한 인간들이 저마다 가슴에 응어리진 사연 하나씩을 풀어놓고 싶어질 만큼 온화하지 않은가? 그런 유혹을 쉽사리 물리칠 만큼 인간은 강하지 않다.
“ 와트가 무슨 뜻인지 알아요?”
“ 우리 역사도 잘 모르는 내게 무슨 대답을 들을 수 있겠어?”
내가 멋쩍게 웃자 그녀는 앙코르 문명에 대해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역사학을 전공하고 있던 그녀는 세계, 특히 동남아 역사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늘 그런 그녀의 설명을 듣는 쪽이었고, 설명을 하는 쪽은 언제나 그녀였다.
“ 와트는 사원이란 뜻이에요. 그러니 생각해보세요. 앙코르와트, 이미 앙코르라는 도시 하나가 온전히 사원이란 셈이니 얼마나 많 은 사원들이 이곳에 세워져 있겠어요? 앙코르의 대부분의 절들은 크메르 문명의 전성기 때 만들어진 것 들이예요. 당시 크메르 제국의 황제는 이곳 앙코르에 앉아 남으로는 베트남, 북으로는 중국 운남성, 서로는 벵갈만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다스렸다고 해요. 100개가 넘는 사원들도 그 때 주로 세워진 것들이고요. 앙코르 동쪽에 바이욘이 있다면, 서쪽에는 바로 그 유명한 앙코르와트가 있는 거죠. 그러니 낮보다는 해질녘의 앙코르와트가 더 멋진 건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에요.”
바이욘의 석상들 머리위로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자 핑크빛의 수줍은 듯 미소 짓던 빛이 붉은색으로 바뀌는가 싶더니 이내 하늘은 오렌지 빛 찬란함으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해자에 오렌지 빛이 내리자 저 멀리 앙코르와트 사원의 회색 실루엣이 호수에 내려앉아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온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앙코르와트의 위대한 유적도 비로소 그녀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는 흥분과 설렘을 이기지 못했다. 가슴이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녀의 흔적을 찾고 싶었다.
“ 어떻게 일은 잘 보고 있는 거야?”
해자를 돌아 그녀가 언젠가 얘기한 적이 있던 수르야바르만 2세의 치적을 그대로 옮겨놓은 사원의 남서쪽으로 향하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아내의 전화였다.
“ 응, 일 보고 있는 중에 잠깐 짬 내서 앙코르와트에 왔어.”
“ 앙코르와트?그렇게 내가 한 번 가보자고 졸라댈 땐 들은 체도 안하더니 갑자기 뭔 바람이 불었대?”
아내가 비아냥거리며 물었다.
“ 이곳까지 와서 여기를 안 들러본다는 것도 그렇지.”
“ 알았어. 그럼 일 잘 보고 조심해서 와.”
아내는 더 이상 나를 추궁하지 않았다. 차라리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휴대폰을 꺼둘 걸 그랬나 싶은 후회가 밀려들었다. 아내에게 하는 거짓말은 시간이 흘러도 통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 한국 사람들도 진짜 많이 간다는데, 죽기 전에 다른 덴 몰라도 앙코르와트 사원엔 꼭 한 번 가봤음 좋겠다.“
아내의 말이 귓속에서 앵앵거렸다.
장장 100m가 넘는, 규모면에서 앙코르와트는 물론이고 앙코르 신전군 전체의 부조에서도 최장의 길이를 자랑하는 수르야바르만 2세의 부조 앞에 멈추어 서고서야 앵앵거리며 시끄럽게 돌아다니던 아내의 말소리가 멈췄다. 다른 부조들이 경전이나 설화의 내용을 바탕으로 상상으로 그려진데 반해, 앙코르 유적에선 드물게 실제 역사를 토대를 지어진 곳이라 그런지 이른 시간임에도 많은 여행객들로 붐볐다. 혼돈의 시기에 국란을 해소하고 태국, 라오스, 말레이반도에 이르는 거대한 식민지를 정벌한 위대한 왕으로서의 자신의 치세를 후대에 전하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을까? 동물이나 나무 등을 부조의 배경으로 삼은 모습에서 모든 걸 이룬 자의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듯 하다.
“ 수르야바르만 2세는 역사적으로 가장 위대하고 신비로운 유적이라는 앙코르와트 사원을 남기고, 이 위대한 유산과 함께 영원불멸의 삶을 꿈꿨겠죠?”
정말 그녀의 말처럼 부조에는 왕관을 쓰고 비슈누 신과 함께 하는 의미로서 가루다(독수리)를 탄 비슈누 신을 얹은 코끼리 위의 수르야바르만 2세가 칼을 뽑아 어깨에 두르고 군의 최고 지휘관임을 과시하고 있었다. 승전에 걸맞은 화려한 행진이 이어진다. 신성한 불을 담은 궤를 운반하는 시종, 악단과 광대들이 뒤를 따르고 제물을 담은 가마도 뒤따른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그 때의 영광은 사라지고 내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녹물이 흘러내린 것 같은 검붉은 돌기둥과 돌기둥위에 새겨진 부조의 낡은 형상만이 전부였다.
“ 사람들은 대부분 이별이란 것에 대해 고통스럽다거나 아프다고만 생각해요.”
“ 그건 당연한 일 아닌가?”
“ 그건 가장 좋은 순간에 무언가를 놓지 못하는 인간의 속성 때문이지, 가장 좋은 순간에 떠날 수 있다면 이별이 결코 아프거나 고통스러운 것만은 아닐 거예요. 아마 양조위가 앙코르와트 사원에 비밀을 묻고 돌아서던 순간의 마음도 그랬을 거라고 봐요."
“ 무슨 소린지 통 모르겠군.”
“ 앙코르와트 사원이 서글프지만 슬프지 않은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그때의 영화는 사라졌지만 가장 빛났던 순간이 고스란히 역사로 이렇게 남았으니까. 사랑도 지나고보면 역사잖아요.”
혹시라도 그녀의 흔적 하나라도 찾을 수 있을까 싶어 사원의 기둥 하나, 부조 하나도 놓칠 수 없어서 뚫어져라 쳐다보고 또 쳐다보았다. 그런 나를 지켜보고 있었든지 한 사내가 지나가면서 말을 건네왔다.
“ 혹시 한국인?”
그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 한국 여행객들이 굉장히 많이 찾아오는 편이죠. 거의 매일 같이 이곳에 오는 편인데, 요즘은 우기라 건기 때보단 조금 여행객들이 적은 편이네요. 건기 때는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여행객들로 아주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이곳 현지가이드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남자의 손에 다짜고짜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 혹시 이런 여자를 본 적이 있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