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네이버스 본부에서 일주일 정도 교육을 받았다. 현장에는 사업을 책임지고 있는 담당자가 부재중인 상태였다. 지체할 틈도 없이 나는 현장에 투입되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현장 파견 전에 받은 텍스트 위주의 실무교육은 머릿속에 실체적으로 입력이 되지 않았다. 현지에서 수행해야 할 사업들이 지연되고 있다는 사실만이 뇌리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잔지바르 공항에 도착하니, 현지 선임 관리자와 한국인 파견 직원이 나를 마중 나왔다. 짧게 인사를 나누고 곧장 사무실로 향했다. 우리를 태운 차량은 한산한 도로의 끝자락 골목길에 자리 잡은 2층짜리 가정집 앞에 도착했다. 1층은 사무실이고 2층은 내가 머물게 될 숙소였다. 계단 앞에 있는 무릎 높이의 작은 철문이 1층의 공적 공간과 2층의 사적 공간이라는 경계를 구분해주고 있었다.
1층은 사무실, 2층은 주거지였던 잔지바르 사무소 전경
내가 해야 할 담당 업무는 크게 3가지였다.
첫 번째는 현지 아이들이 영어 공부를 재밌게 배울 수 있는 영상 콘텐츠를 제작하고 지원하는 것이었다. 한국의 여러 기관들이 힘을 모아 잔지바르에 최고급 방송 시설과 장비가 완비된 콰라라미디어센터를 지어주었다.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최첨단 방송시설이었다. 그러나 미디어센터에서 일하는 현지 직원들은 전혀 방송 전문가가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교육훈련이 필요했다. 프로젝트의 성공은 그들이 자유자재로 방송 장비를 활용해서 좋은 콘텐츠를 제작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주어진 시간 내에 미디어센터 직원들을 방송 전문가로 만들어 양질의 콘텐츠를 제작해내느냐가 관건이었다.
두 번째는 콰라라초등학교를 완공하여 지방정부에 이양하는 일이었다. 이미 1층은 건축이 끝난 상태였지만 잔지바르 대통령 지시로 2층을 증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 프로젝트도 시공사와 감리사 역량, 건축 자재 조달, 현지 날씨 등의 여러 변수로 인해 예정보다 늦어지고 있었다. 초등학교가 제대로 지어질 수 있도록 지방정부와 공동으로 관리하고 수시로 소통하는 업무를 진행해야 했다.
세 번째는 콰라라중등학교 방송반 청소년들이 미디어 전문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었다. 미디어에 관심 있는 청소년들에게 방송 제작과 관련한 실무교육을 제공하고 방송 제작에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본격적으로 시작을 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업무를 수행할 현지 직원을 채용해서 프로젝트를 구체적으로 기획하는 일이 우선이었다.
어느 일 하나 쉬운 게 없었다. 시간도 내 편이 아니었다. 일을 체계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을 동시다발적으로 추진해야 했다. 현지에서 벌어지는 일을 전반적으로 나에게 인수인계해 줄 사람도 없었다. 현지 직원들도 각자 담당하고 있는 업무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나는 이 상황이 낯설지 않다는 듯 묵묵히 받아들였다. 이런 일들은 한국에서도 비일비재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일하게 될 지리적 공간이 한국에서 잔지바르로 이동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아프리카에서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길 바라는 것 자체가 지나친 욕심이란 걸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아프리카에서는 계획한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거라고 일말의 기대를 하지 않는 게 좋다. 그렇지 않으면 나만 힘들어질 뿐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괜히 원망하게 된다. 예상치 못한 다양한 변수를 즐길 줄 알아야 한다.
물론 나도 사람인지라 뜻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으면 화가 나기도 했다. ‘다시는 아프리카에 오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때때로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모든 일이 착착 진행되는 곳 또한 아프리카다. 속상한 일이 계속되어 힘이 쭈욱 빠질 때도 있지만 아프리카를 알아갈수록 미소 짓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아프리카는 나에게 그런 매력을 지닌 곳이다. 내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즉 나의 마음가짐과 태도가 중요하다.
케냐의 시골 마을에 있을 때였다. 한 달 전부터, 마을 청년들과 주말 오후 2시에 축구 경기를 하자고 약속을 했다. 나는 습관대로 약속 시간 15분 전까지 마을 운동장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곳엔 나 혼자였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내가 차고 있는 손목시계를 쳐다봤다. 시곗바늘이 정확히 오후 3시를 가리켰다. 여전히 드넓은 운동장에 나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내가 날짜를 헷갈린 건 아닌지 나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4시가 되어서야 두 명의 청년들이 나타났다.
아무도 없는 운동장에서의 축구 경기는 내게 아프리카식 시간 개념을 알려주었다.
“오늘 축구 시합을 하는 거 맞지?”
나는 그들에게 물었다. 그들은 당연한 걸 물어보냐는 듯한 눈빛과 함께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러면서 한마디 거들었다.
“축구를 하러 친구들이 오는 중이에요.”
3시간이 지나고 5시가 되니까 10명 정도의 친구들이 모였다. 그들은 “이제 곧 경기가 시작된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해가 질 무렵에서야 경기를 시작할 것만 같았다. 오후 6시 30분이 되면 온 마을에 어둠이 깔린다는 자연의 이치를 잘 알고 있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축구공을 차 보지도 못하고 먼저 자리를 떠나야 했다. 축구 경기보다 어둠이 사라지기 전에 집에 도착하는 게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은 잔지바르에서 현지 지인이 토요일 오후에 나를 만나러 집으로 오겠다고 했다. 지인의 방문 계획만 없었으면 늦장을 부렸을 텐데, 평상시보다 일찍 일어났다. 지인이 오기 전에 집안 청소부터 은행일까지 할 일이 조금 있었다. 볼일을 다 보고 나서 오후 내내 지인을 기다렸다. 그러나 지인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난 너무 황당했다.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날 아는 사람이기에 나한테 전화나 문자라도 보내주면 좋았으련만 아무 소식이 없었다. 이후에 지인을 마주쳤고 우리 집을 방문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물어봤다. 그때는 그저 인사치레로 말을 건넸다는 것이었다. 정말 어이가 없어 웃음만 나왔다.
나를 배려하지 않은 지인의 모습에 처음엔 짜증이 확 났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현지 문화를 하나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지인이 나쁜 의도를 가지고 나를 골탕 먹이기 위해 행동한 게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누구를 탓해 뭐하랴. 현지 문화를 알지 못했던 나를 탓해야지. 아프리카에 왔으면 지역마다 각기 다른 그들만의 고유문화를 하루빨리 터득하고자 노력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그들에게 내 생활문화에 맞춰 행동해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나도 어느 순간부터 현지 문화에 완전히 적응해나갔다. 누군가를 만나면 의례적으로 “내일 오후에 맥주 한 잔 마시자.”, “다음 주 일요일에 축구 시합하러 아침 10시에 운동장에서 만나자.”, “모레 아침에 우리 집에서 밥을 먹자.”라는 인사치레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기 시작했다. 어느 누구도 약속을 지키지 않은 나를 비난하지 않았다.
아프리카의 대표적인 언어 중 하나가 스와힐리어다. 스와힐리어는 몰라도 누구나 한 번쯤은 ‘하쿠나 마타타(Hakuna Matata)’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영화 ‘라이온 킹’의 삽입곡 제목이기도 하다. 우리말로는 ‘아무 문제없어.’라는 뜻이다.
아프리카 문화를 나타내는 가장 상징적인 단어라고 생각한다. 오늘 하루도 끝나지 않았는데, 굳이 오지 않은 내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이다. 물론 아무런 걱정 없이 행복한 인생만을 사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유한한 존재의 우리는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는 불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아프리카 친구들의 ‘하쿠나 마타타’를 좋아한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여유롭게 바라보고자 하는 그들의 사고방식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마음이 급하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존중하려는 자세가 중요했다.
아프리카 땅을 다시 밟는 순간, 아프리카만의 생활양식과 고유문화 속으로 나를 내던져야 한다. 아프리카에 다시 오게 된 목적과 이유를 잃지 않되, 한국인으로서의 문화적 정체성에 내재된 의식과 고정관념을 버릴 필요가 있다. 나는 아프리카 지역공동체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혼자만 앞으로 내달릴 수는 없다. 다른 공동체 일원들의 손을 잡고 앞으로 한 발 짝씩 내딛는 것이 중요하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지도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