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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묻는 사람 K Jun 20. 2024

각각의 계절, 각각의 시간

냉정한 새끼!


이제 임종을 돕는 기도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만약 자신이 자리를 비울 때를 대비해, 누구든 할 수 있도록 침대 옆 탁자에 메모도 남겼노라고 했다. 살아있는 사람을 앞에 두고 너무 서두른다 싶어 내키지 않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잠든 아버지를 등지고 앉아, 장례 절차를 준비하고, 영정 사진을 고르고, 리본을 만들었다. 장례식장에 틀어 둘 음악 목록을 추렸고, 스피커 선을 점검했다.

 

휠체어조차 사용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침대를 끌고 병원 곳곳을 누비며 다녔다. 어떤 때는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려는 듯도 했고, 가끔은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는 듯한 모습도 같았다. 생기 잃은 아버지는 아들이 이끄는 대로 어디로든 향했다. 아주 잠깐 의사 표현이 가능할 만큼 기능과 의식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눈물을 흘렸고, 그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라고 다독였다.


그마저도 할 수 없 되었을 때, 그러니까 겨우 남아있던 감각조차 힘을 고 눈동자 초점이 흐려 즈음에는 시선이 닿을 만한 곳에 성모상 [방울새의 성모. 라파엘로. 우피치 미술관] 사진을 붙여두었고, 꽃바구니를 놓아두었다. 조명 채도를 낮추고, 초침 소리가 거슬리지 않을 무소음 벽시계로 바꾸었으며 아로마 향을 바꿔가며 켜두었다. 그러면서도 밤이면, 임종을 돕는 기도를 빼놓지 않았다.


요양원에 계신 어머니는 걱정하지 말라고, 편하게 가시면 된다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흰머리가 듬성듬성 난 남동생과 시어머니를 똑 닮은 여동생이 지나치게 울지 않도록 단속했다. 물론 그 자신도 울지 않았다. 슬픔은 각자 해결해야 한다고, 아버지 마음 불편하게 그런 모습은 보이지 말라고 내게도 연거푸 당부했다. 매정한 새끼.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계절을 그는 호스피스 병동에서 꼬박 보냈다. 어떤 밤에는 옆 방에서 우는 소리가 난다며 메시지를 보내오기도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나의 봄은 고속도로에 있었다. 버스 안에서 새벽녘 어슴푸레한 하늘을  보았고, 휴게소에 들렀을 때 멀리 반발한 꽃을 환각인 듯 보았다. 달리는 고속도로 위에서 깊은 밤하늘을 보며 날짜를 헤아렸다. 봄은 온통 그곳에만 있었다.


나의 초여름 또한 서울과 진주 사이 그 어디쯤에 있었다. 성급한 더위라 여기면서도 시간이 빠르게 지나는 것이 두려웠다. 그때에도 그는 장례 절차를 준비했다. 가끔 별것 아닌 일에 짜증을 냈고, 상복을 입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웠으며, 완장 차는 장례 문화를 비난하며 분노했다. 그러곤 다시 밤이면, 임종 기도를 드렸다.


빠른 봄, 더딘 여름, 한 사람은 땅에 묻히고, 남은 사람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꿈인 것도 아닌 것도 같던 지난 시간을 반추하다가 나는 이삼일쯤 앓았다. 인도로 돌아간 시동생도, 진주에 남아있는 시누도 며칠쯤 아팠다고 했다. 그는 폭염 시작되고서야 몸살을 앓는다. 멈춰 있던 그의 계절은 지금 어디쯤 와있으려나. 이제는 그가 마음껏 슬퍼하기를, 온전히 애도하며 여름을 보내, 가을에는 조금 가벼워지기를, 밤마다 몰래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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