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죽었다.
야만적인 엘리스씨. 황정은 장편. 문학동네. 2013
다섯 살 아이가 죽었다. 지난 연말 실종 사건이라며 애를 태우더니, 군산시 내초동 인근 야산에서 사체로 발견되었다. 17년 12월 31일 새해를 맞는다는 설렘으로 들떠 있을 때, 아이 친부와 내연녀의 구속 영장이 발부되었다. 복잡한 가정사 때문에 수사에 혼선을 빚었다는 후속 기사가 나왔다. 친모에게서도 학대 정황이 있었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갑상선 기능 저하증을 앓았고, 발달 장애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고름 흘러나오는 발이 밟혔더라고, 사망 일주일 전부터는 걷는 게 불가능했다는 뉴스도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삶이 온통 고통과 공포뿐인 사람은 없다고 단언했다. 가혹한 운명을 타고났다 해도, 인생에서 기쁨은 있었을 거라고, 설렘도, 웃음도, 행복도 있었으나 다만 찰나여서 의식하지 못하는 거라고 단정 지었다. 누구의 삶도 그토록 참혹할 수만은 없는 거라고 확신했다. ‘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에서도 희망이 있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므로 믿고 싶었다. ‘기억’의 문제다. 힘든 상황에 놓인 사람은 불쾌하고 불행했던 순간을 더 많이 떠올리기 때문인 거다. 불행뿐인 삶은 없다. 적어도 누군가 한 사람은 도와주는 존재가.... 있게 마련이다.
5년, 짧은 생을 떠올렸다. 생이라고 할 만큼 살아보긴 했나. <110cm, 20kg, 보통 체형, 윗니 두 개 없음. 쌍꺼풀 없고 사시임. 보상금 최고 500만 원> 실종 아동을 찾는 전단에 박힌 두 장의 사진을 보았다. 가슴이 저릿했다. 고통, 두려움, 분노, 절망, 공포, 좌절. 이런 것 말고 없나. 맞아 죽은 삶이었어도, 좋았을 때는 있지 않았겠나. 희망 따윈 아니어도 좋으니, 사는 동안 괜찮을 때도 있었다고, 고통만은 아니었다고, 그러니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 마디만 해줘라.
네가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 염려스럽고 안쓰러웠지만, 생명은 경이로운 거라고, 대견하다고 누군가는 생각했을 것이다. 첫 번째 눈 맞춤, 첫 번째 옹알이, 처음으로 입 열어 ‘엄마’, ‘아빠’를 말했을 때, 그는 놀라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을 것이다. 일어나 첫걸음을 옮겼을 때, 너의 첫 성공 경험을 사진으로 찍어두며 다짐했을 것이다. 언제까지고 너를 지켜줄 거야....... “웃기시네.” F. 스콧 피츠제럴드는 위대한 개츠비를 빌어 말했지.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있지는 않다.”라고. 아이에겐 이처럼 당연한 생존 조건조차 허락되지 않았을는지도 모르겠다.
눈물이 났을까? 두려웠을까? 평소와 다름없었으므로, 아무렇지 않았을까? 살고 싶었을까?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거로 생각했을까? 목 놓아 울었을까? 울음소리조차 낼 수 없었을까? 도와줄 사람을 기다렸을까? 꿈이라고 생각했을까? 상상력을 발휘하다, 차라리 마지막 순간에는 의식이 없었으면 좋았을 거라고 속으로 되뇐다.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떠난 아이를 떠올리는 일은 고통이다. '미숙아로 태어나지 않았으면 괜찮았을까'라고 생각하는 나 자신이 혐오스럽다. 아이는 영문도 모르는 채 맞았고, 이유도 모르는 채 죽었다.
황정은 작가의 <야만적인 앨리스 씨>를 다시 손에 잡았다. 기억하기 위해서, 고통스럽기 위해서 책을 읽었다. “그런 걸 알고 있었을까. 몰랐을 것이다. 멍청하니까. 아둔하니까. 알았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는지도 모르겠다. 맛을 보아야지. 배가 아플 정도로 서글픈 상태라는 것을 모르는 계집애는 맛을 봐야지. 무신경한 인간은 상처를 받아봐야 안다. 찢어져야지. 두고 봐라 너도 찢어져야지.”(18쪽) 무신경한 인간은 상처를 받아봐야 안다. 그래 찢어져야지, 앨리시어의 분노와 저주가 고스란히 나에게 향했다.
“뭐가 유별나게 거슬렸는지 그를 도로 마당으로 끌어내서 몸을 밀치고 당기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럴 때가 있고 그럴 땐 멈추지 않는다. 그럴 때 그녀는 어떤 사람이라기보다는 어떤 상태가 된다. 달군 강철처럼 뜨겁고 강해져 주변의 온도마저 바꾼다. 씨발됨이다. 지속되고 가속되는 동안 맥락도 증발되는, 그건 그냥 씨발됨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씨발적인 상태다. 앨리시어와 그의 동생이 그 씨발됨에 노출된다. 앨리시어의 아버지도 고모리 이웃들도 그것을 안다. 알기 때문에 모르고 싶어 하고 모르고 싶기 때문에 결국은 모른다.”(40쪽)
사람의 행위에는 이유가 있는 거라고 관습적으로 생각해왔다. 인간 행동을 분석하고, 행위를 탐색하다 보면 세상에 납득 못 할 인간도 별로 없는 듯했다. 이해가 깊어진다는 착각에 빠졌다. 폭력의 대물림, 가해자와 피해자의 모호한 경계, 그들에겐 합당한 이유와 그럴만한 배경도 있어 보였다. “웃기시네. 그렇게 말하고 싶은 앨리시어는 꺼져라. 그렇게 할 때 그녀는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하는 거라니까. 그런 순간에 그녀는 한 점 빗방울처럼 투명하고 단순하다. 때리고 싶어서 때리는 거야. 때리니까 때리고 싶고 때리고 싶으니까 가속적으로 때린다. 참지 못한다기보다는 참기가 단지 싫은 것이다. 때려서는 안 된다는 당위를 내면에 쌓는 일이 귀찮고 구차해 이것도 저것도 마다하고 때리는 데 몰두하는 것이다.”(41쪽)
5살 아이가 맞아 죽었다. 얼마 후 4살과 2살 아들, 15개월 된 딸이 제 어미가 담뱃불로 낸 사고로 불에 타 죽었다. 그리고 며칠 뒤, 침대에서 떨어진 8개월 된 아이가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뺨을 맞았다. 아가는 11일간 여행 가방 속에 담긴 채 베란다에 방치되었다가 발견되었다. 2018년 새해, 봄이 오려면 아직 한참 멀었는데, 제 아비와 어미 손에 죽어 사라진 아이들에 관한 기사는 계속되고 있다. 나는 이제 인간의 행위를 이해한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는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때리고 싶어서 때리고’, 자기 합리화 도구로 이유를 만들 뿐이니까.
“그대가 옳다. 모든 것은 지나갈 것이다. 다시 한번 그대가 옳다. 그대와 나의 이야기는 언제고 끝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천천히 올 것이고, 그대와 나는 고통스러울 것이다.(162쪽) ”
2018.01.18.
<야만적인 엘리스 씨. 황정은 장편소설. 문학동네. 2013.>를 인용하였습니다. 제가 손꼽아 좋아하는 몇 안 되는 작가이고 '인생 책'중 한 권입니다. 이 책이 많이 읽혔으면 참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