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원광우 Oct 02. 2023

아내는 변덕쟁이

 뜸해진 동반외출을 만회하려는 마음에서 아내에게 근교의 수목원으로 나들이를 제안한 건 어제 저녁 무렵이었다. 기사를 검색하다 한 사이트에서 ‘수원의 가볼만 한 곳’이란 제목의 글을 읽은 것이 계기였다. 거기서는 세 곳을 소개하고 있었는데 두 곳이 수목원이었으며 나머지 한 곳은 농업박물관이었다. 수목원 중 한 곳은 우리가 이미 방문한 곳이었다. 초록이 우거진 곳이라면 두 말 않고 가보자며 앞장을 서는 아내였기에 남은 두 곳 중 어디를 선택해도 아내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어렵지 않아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말을 마치자마자 아내는 선뜻 따라나서겠다는 뜻을 밝혔다. 

 9월도 중순으로 접어들고 있었지만 오늘따라 늦더위가 한창이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심해지는 지구온난화현상은 9월이면 가을이라는 등식마저 무색하게 만들었다. 내리쬐는 햇살은 유독 땀이 많은 체질인 나로 하여금 살의마저 느끼게 했다. 도무지 뜨거운 아스팔트 바닥을 걸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난 아내에게 차를 몰고 갈 것을 제안했다. 그럴 경우 수목원과 농업박물관을 하루에 다 돌아보는 것이 가능할 뿐 아니라, 두 곳 모두 주차공간이 넉넉해 주차문제라면 거의 노이로제 증상을 보이는 아내여도 신경 쓸 일이 없다는 점을 특히 부각시켰다. 

 프리젠테이션에 가까운 장황한 내 설득에도 아내는 단호하게 거부의사를 표명했다. 목적지 다음 동선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모름지기 거기에는 습관처럼 드러내보이곤 하던 변덕이 도사리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원치 않는 상황이 발생할 경우 언제든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목적지를 변경하겠다는 음흉한 의도가 표현만 되지 않았을 뿐 말속에 깊숙이 숨어있었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수목원 주변에 위치한 한 맥줏집 때문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한 번 나와 같이 그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자신이 직접 한 요리를 제외하고는 좀체 음식칭찬에 인색한 그녀가 그날 이후 그 집을 두고 치킨 인생맛집이라는 용어까지 하사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수목원 구경이 끝나는 대로 그곳에서 치맥을 즐기려는 속내를 은근히 내보인 것일 수도 있었다. 더운 날씨에 시원한 맥주 한 잔. 맥주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나에게 그건 오랜 가뭄 끝에 단비와도 같은 소식이었다. 난 오히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집을 나섰다.  

 집에서 버스정류장까지는 700여 미터에 불과했지만 햇살이 쏟아 붓는 쨍쨍한 열기는 우리의 발걸음을 한층 더디게 만들었다. 채 반도 못간 지점에서 아내가 멈춰 섰다. 표정에는 지친 기색이 투명하게 비쳐났다. 나 역시 아무리 수목원이라지만 무더위를 감수하며 돌아다닐 자신이 나질 않는 마당에 오죽할까 싶었다. 

 힘들지? 지금이라도 내가 가서 차를 갖고 나올까? 

 솔깃해 할 줄 알고 던진 말이지만 아내는 의외로 손사래를 쳤다. 난 그 손사래에 차량운전에 대한 반대의미 이외에도 다른 뜻이 숨어있음을 간파해냈다. 흔들거리는 손목 사이에서는 수목원뿐만 아니라 맥주고 치킨이고 간에 모든 걸 포기하고 싶다는 체념의 뜻이 강하게 일렁대는 중이었다. 굳이 그걸 내색하지 않는 이유조차 쉽게 파악되었다. 오늘마저 뚜렷한 명분 없이 계획을 변경해버린다면 변덕쟁이라는 단어는 이제 단순한 놀림감을 넘어서 자신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마지못해 떼어놓는 발걸음에서 하염없이 피어나고 있었다.

 아내의 속마음을 떠보기로 했다. 

 이리 더운데 그냥 가까운 곳에서 점심이나 먹고 찻집에 가서 커피나 한 잔 한 뒤 돌아갈까? 

 예상은 정확히 적중했다. 아내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럴래? 왜 거기 있잖아? 우리가 자주 가던 냉면집. 수목원이야 단풍이 드는 가을에 더 예쁘지 않겠어?

 그길로 우리들의 수목원 행은 단박에 좌절되었다. 대체 목적지로 정한 냉면집과 단골카페로 향하는데 나에게서 무언가 평소와 달라진 점이 발견되었다. 아내 탓에 오늘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했음에도 아쉽다거나 괜히 시간낭비를 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질 않는 것이었다. 하루의 일정이 무너져버린데 대한 실망감 또한 생겨나질 않았다. 그저 변덕의 원인을 서로에게 전가하는 농담을 일삼으며 아내와 옥신각신한 게 다였다. 그조차 화가 나거나 분노가 생겨서가 아닌 웃음을 유발하는 장난기일 따름이었다.

 적당히 배를 채운 상태에서 카페에서 시간을 보낼 때였다. 묘한 의문이 일었다. 하루를 고스란히 망친 거나 진배없는데 오늘은 왜 언짢다는 감정이 생기지 않는 것일까? 답은 어렵지 않게 찾아졌다. 일정을 변경한 주체가 바로 나였기 때문이었다. 만약 목적지를 바꾸자는 말이 아내의 입에서 먼저 나왔다면 난 또 아내의 변덕을 문제 삼으며 불쾌감을 표출했을 것이었다. 설령 이성적으로 판단할 때 그것이 올바른 결정이라 하더라도 남으로 인해 나의 시간들이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그럴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건 잘못을 남에게 전가하려는 인간본능에서 비롯되는 행위였다. 차이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는 달리 겉으로 드러난 행위를 누가 했느냐의 차이. 

 결과적으로 오늘 일은 나에게 분노를 조절하는 방법을 한 가지 알려준 셈이었다. 엄청나게 나를 화나게 하는 일도 그 원인의 주체를 나로 만드는 순간 내 마음속에 분노가 자리 잡을 공간은 줄어든다는 사실.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을 향한 분노는 그만큼 제한적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 당연히 분노의 크기나 분량도 남을 향해 폭발시키는 것에 비해 훨씬 줄어들었으리라.

 아내의 변덕이 심하다는 건 가족 사이에 이미 알려진 만큼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아내가 변덕을 부릴만한 시점에 내가 먼저 나설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아내의 변덕으로 인해 생기는 나의 화를 줄이는 방법이기도 하거니와 우리 부부관계가 상처입지 않는 더없이 훌륭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이전글 내 이름은 빨강 - 오르한 파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