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을 바꾸는 것은 '이상한 나라'의 '야만'
'문명'을 바꾸는 것은 '이상한 나라'의 '야만'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루이스 캐럴, 손영미 옮김, <시공주니어>, 2001.
"첫째 애는 성급하게
'시작해요!'라고 명령하고,
둘째 애는 조금 상냥하게
'재미있게 해 주세요.' 하고,
셋째 애는 채 일 분도 못 참고
이야기를 가로막는다.
아이들은 이내 입을 다물고,
상상 속에서 기이하고 새로운
마법의 땅을 여행하고
새나 짐승과 사이좋게 이야기하는
꿈의 아이들을 쫓아다닌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라고 믿으려 한다.
지친 이야기꾼이 이야기도 떨어지고
상상의 샘도 말라서
'나머지는 다음에 하자.' 하고
화제를 돌리려고만 들면,
아이들은 '지금이 다음이에요!' 하고
신바람이 나서 외친다.
'이상한 나라' 이야기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이렇게 천천히, 하나씩 하나씩,
신기한 이야기들이 생겨났다.
이제 이야기는 끝났고,
우리는 저물어 가는 햇살 속에서
즐겁게 노를 저어 집으로 돌아간다."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루이스 캐럴, <금빛 찬란한 오후 내내>, 1865.
1862년 7월 4일, 찰스 도지슨은 템즈 강에서 앨리스 리들의 세 자매들과 보트를 타고 놀면서 '이상한 나라' 이야기를 시작한다. 앨리스 리들은 돌아오는 길에 "그것을 책으로 써 주시면 정말 재미있을 것"이라고 말했단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1865)를 쓴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의 본명은 찰스 루트위지 도지슨(Charles Lutwidge Dodgson). 옥스퍼드 대학 수학부 교수였고, 그 대학 학장인 헨리 리들의 딸들과 '말장난'과 게임을 하며 놀아주던, '루이스 캐럴' 필명은 모호하나 본명이 '찰스'인 것을 보니 남성이다.
그는 수학 뿐만 아니라 논리학, 그림, 사진 등을 즐겼으며, 영국 빅토리아 시대 최고의 '기인'에 속한다고도 한다.
앨리스(Alice)는 '그림도 대화도 전혀 없는 책'을 읽고 있는 언덕 위의 언니 옆에서, 동화의 이야기가 시작하자마자 잠이 드는데, 장자의 '호접몽'처럼 경계는 모호하다. 아마도 그 경계는 '말하는 흰 토끼'였을 텐데, 이를 '비정상적인 일'로 생각하지 않고 '지극히 자연스럽게' 느끼는 순간이다.
'나비가 나인지, 내가 나비인지' 모호해진 상황에서 '이상한 나라'로 진입한다.
앨리스 어린이는 '현실'에서는 규칙들을 내재화시키지 못한 '비정상'이다. 그러나 '이상한 나라'에서는 반대로 '현실'의 규칙을 지키려 하는 '비정상'이 된다. 역시 모호한 경계에 계속 서 있다. 그럼에도 그 꿈에서 깨지 않는다. 음료수를 마시고 몸이 작아지고 과자를 먹고는 거인이 되고 '눈물바다'를 만들어 떠다니면서도 깨어날 생각을 않는다.
'어른들'은 가위 눌려 깰 이야기들일 수 있겠으나 앨리스는 끊임없는 호기심으로 이야기를 끝까지 이어간다. 작자의 의도이기는 하나, 어쨌든 '이상한 나라'에서 어린이 앨리스의 호흡이 어른인 언니의 그것보다 길다.
'현실'의 어른인 언니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꿈 속의 모험을 이어가기에 너무 성장했을 것인데, 꿈에서 깨어 '이상한 나라' 이야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동생의 뒷모습을 보며 '반쯤의 꿈'을 꾼다.
"'아, 정말 이상한 꿈을 꿨어!
앨리스는 언니에게, 여러분이 방금 읽은 모험 이야기를 최대한 기억해 내서 모두 해 주었다...
앨리스의 언니는 동생을 보내놓고 턱을 괴고 앉아서 저물어 가는 해를 바라보며, 어린 앨리스와 앨리스의 멋진 모험을 생각하다가 꿈 비슷한 것을 꾸었다...
언니는 눈을 감고 앉아서 자신이 이상한 나라에 있다는 것을 반쯤은 믿었다. 하지만 눈만 뜨면 이 모든 것이 단조로운 현실로 바뀌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루이스 캐럴, <앨리스의 증언>, 1865.
'현실'의 규칙에 익숙해진 언니는 온전히 '이상한 나라'로 들어갈 수 없다. 눈을 감고 졸면서도 눈만 뜨면 미친 모자장수와 삼월토끼의 '달그락거리는 찻잔소리'는 '양들의 방울소리'로, '가짜거북의 구슬픈 울음소리'는 '멀리서 들려오는 소들의 울음소리'로 바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어른'인 언니는 '경계' 혹은 '선'을 넘지 못한다. 넘을 수 없다.
'현실'의 '비정상'인 어린이 앨리스는 이야기 첫 장부터 모호한 '경계'에 줄곧 섰다가 간단히 '선'을 넘어버렸다. '흰 토끼'를 매개로 빠져버린 '이상한 나라'에서 온갖 '비정상'들을 만나면서 '현실'적이었던 자기를 버리고 금방 동화되어 버린다.
'이상한 나라'에서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선이란 애초에 없다.
꿈에서 깨어도 앨리스에게는 변한 것이 없다.
보물섬을 다녀와 보물을 얻은 것도, 시련을 통해 어른이 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상한 나라'로의 기행을 통해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평생 잊을 수 없는 '영역'을 구축한다.
'현실'의 어른들 규칙을 '문명'이라 하자. 한편으로 이 어린이의 '영역'을 '야만'이라 해보자.
'문명'의 관점에서 '야만'은 '비정상'일 테지만, 이 '문명'은 '혁신'과 '개혁'을 외칠 때도 절대 '선'을 넘지 않는다. 반면, '야만'이라는 '이상한 나라'에는 '경계'가 없으니 '선'은 넘으라고 있는 것이다.
넓은 땅을 지배했던 로마제국이라는 '문명'을 무너뜨린 건 다른 '문명'이 아니라 게르만족 '야만'의 이동이었다.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로버트 스티븐슨의 [보물섬] 다음으로 내 어린 시절을 지배했던 이야기다. 스토리나 구성을 생각할 수 없는 나이에 그런 걱정 없이 '의식의 흐름'으로 읽을 수 있는, 한편으로 머리는 복잡하나 그 정체가 무언지 굳이 알 필요 없는 이야기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규칙들을 강요하는 '현실'에서 잠시나마 탈주하는 문이었고, 지금은 굳게 닫았으나 '선'을 넘어야 할 때 언제든 열 수 있는 마음 속 출구일 것이다.
디즈니 만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내 어릴 때는 볼 수 없었고, 내 아이들 어렸을 적 보여준, 사실은 내가 주로 보고 싶었던 애니메이션인데,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시리즈 중 개인적으로 제일 잘 만든 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1951)라고 생각하는 이유도 원작 '고전 동화'에 대한 애정 때문일 게다.
또한, 냉전시대 미국의 '매카시즘(반공주의)' 광풍 속에서 나왔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물론 지극히 보수적인 디즈니의 의도는 아닐테지만, '전체주의'가 지배적인 세상에 던지는 '이상한 나라' 이야기란 그 자체로 멋진 것 아닌가.
'문명'을 바꾸는 것은 '이상한 나라'에서 온 '야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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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루이스 캐럴, 손영미 옮김, <시공주니어>, 2001.
2.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루이스 캐럴, <교원애니메이션세계명작동화>,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