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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Sep 19. 2020

[빨간 머리 앤](1908) - 루시 몽고메리

"모퉁이를 돌면..."

"모퉁이를 돌면..."
- [빨간 머리 앤](1908), 루시 몽고메리, 최지현 옮김, <보물창고>, 2011.





"다행히 매튜는 먼저 말을 걸어야 하는 곤혹스러움을 면할 수 있었다. 매튜가 자신에게로 오고 있다는 확신이 들자마자 여자 아이는 햇볕에 그을린 앙상한 손으로 낡아빠진 구식 여행가방의 손잡이를 잡고 일어서더니 남은 손을 매튜에게 내밀었다.
'초록 지붕 집의 매튜 커스버트 씨죠?'
아이는 독특하게 맑고 낭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만나서 정말 반가워요. 아저씨가 저를 데리러 오지 않으면 어쩌나 막 걱정을 하던 참이었어요.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나서 아저씨가 오지 못하는 걸까, 상상하고 있었어요. 혹시라도 오늘 밤 저를 데리러 오지 않으시면 기찻길을 따라 가 저기 모퉁이에 있는 커다란 야생 벚나무에 기어 올라가서 밤을 보내기로 마음먹은 참이에요. 전 조금도 무섭지 않아요. 온통 하얗게 꽃이 핀 벚나무에서 달빛을 받으며 잠을 자는 건 정말 낭만적이지 않을까요? 대리석으로 꾸민 커다란 방에 살고 있다고 상상할 수 있으니까요. 아저씨가 오늘밤에 오지 못하더라도 내일 아침에는 꼭 오실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매튜는 아이의 작고 앙상한 손을 어색하게 잡고는 당장 어떻게 할지 마음을 정했다. 두 눈을 반짝이고 있는 이 아이에게 착오가 있었다고 자기 입으로 말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가 마릴라가 대신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 [빨간 머리 앤], <2. 매튜 커스버트, 놀라다>, 루시 몽고메리, 1908.





내가 어릴적인 1980년대는 방송국에서 'TV 명작동화' 시리즈를 줄창 틀어줬다. 전부 일본 애니메이션이었다는 사실은 한참 후에야 알았다. 우리집에는 노란색 표지의 <세계위인전집>과 <세계명작동화>가 한 질씩 있었는데 'TV 명작동화'를 감명깊게 본 후 '원작'을 꺼내 읽곤 했다. 가장 많이 읽은 내 '인생동화'는 로버트 스티븐슨의 [보물섬]이었다. 두번째인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그 전집에 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앨리스 애니메이션은 일본 것이 아닌 월트 디즈니판으로 기억난다. 세번째 감명깊은 게 [빨간 머리 앤]인데, 그 전집의 앤을 다 읽었는지 또한 기억나지 않는다. TV 시리즈와 동화전집이 뒤죽박죽되면 책을 읽었는지 만화를 본 건지 경계가 모호하다.

처가 둘째 딸 읽으라고 사준 [빨간 머리 앤]을 최근 우연히 읽고 나니, 사실 나는 루시 몽고메리의 소설 [빨간 머리 앤]을 처음 읽은 거였다. 열네살인 둘째에게 '앤이 열여섯살에 끝나더라'라고 전하니 옆에서 듣던 처가 '앤이 열여섯에 죽느냐?'고 묻는 걸 보니 처도 안읽은 거였다.





1874년에 캐나다 프린스 에드워드 섬에서 태어나 외조부모 손에 자란 루시 모드 몽고메리(Lucy Maud Montgomery)는 외지에서 교사로 일하다가 홀로된 외할머니와 함께 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자전적 이야기를 각색하여 [빨간 머리 앤]을 18개월간 지었다고 한다. 2년간 여러 출판사로부터 거절당하다가 1908년에 보스턴 출판사에서 출간되자마자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후속 얘기를 쓰기도 했다.
수다스럽고 끊임없이 떠들어제끼며 '상상개그'를 날려대는 열한살 빨간 머리 앤은 아마도 루시 몽고메리 본인의 자화상이었을 게다. 1995년인가 조숙한 여자아이 눈에 비친 어른들의 모습을 그린 소설 [새의 선물]의 그 꼬마가 작가 은희경 본인이었을 거라는 그 추측처럼.




마차타고 달리는 가로수길을 '기쁨가득 새하얀 길'로 이름붙이고, 본인의 빨간 머리로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며, '앤'이라는 이름은 촌스럽고 평범하니 '코델리아'라고 불러주거나 아니면 끝에 'e'가 붙는 '앤(Anne)'으로 불러달라고 막무가내로 부탁하는 열한살 고아소녀의 특징은 단연 '상상력'이다. 결국 머리가 좋고 시골학교에서 성적도 좋아 도시의 사범학교 같은 곳으로 진학하기도 하지만, 앤의 '개그'는 가난하고 불우한 환경과 끊임없는 연습의 결과일 수 있겠다. 매튜 아저씨를 만나자마자 내던지는 장황한 말들은 아마도 기차역에서 그를 기다리는 내내 연습하고 외워둔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아, 제발 저를 코델리아라고 불러 주세요. 어차피 제가 여기서 잠시 동안만 있을 거라면 아주머니가 저를 뭐라고 부르든 아무 상관없잖아요. 앤이란 이름은 너무 낭만적이지가 않아요."
- [빨간 머리 앤], <3. 마릴라 커스버트, 놀라다>



이런 식이다. 남자 아이를 입양하여 일꾼을 만들려던 매튜와 마릴라 커스버트 독신남매가 착오로 여자 아이가 온 것을 알고는 초록 지붕 집에 살지 못할 수도 있는 '절망' 앞에서도 '상상'과 '개그'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희망'과 '절망'의 극과 극을 오가는 이 빨간 머리 소녀는 당장 내일 지구가 망한다 하더라도 '유언개그'를 날릴 참인데, 사실은 불우하고 가난한 환경을 버텨낸 힘이 그것이다. 교사인 부모가 열병으로 일찍 돌아가고 어린 나이부터 다른 집 더부살이를 하며 보모일을 했고 그조차도 여의치 않아 고아원에 갔을 때는 깨진 유리에 비친 자신과 숲에서 메아리치는 본인 목소리에 이름을 붙여 끊임없이 상상하고 대화하면서 수련한 대단한 내공의 소유자다. 절친 다이애나에게는 슬쩍 "가난해서 위안이 되는 게 한 가지 있지. 상상할 것들이 많다는 거야."라며 '비기'를 전하기도 한다.


"어른이 되는 건 그래서 나쁜가 봐요. 그 사실을 이제 막 깨닫기 시작하고 있어요. 어릴 때 그렇게 원하던 것도 막상 가지고 보면 그다지 멋지지 않거든요."
- [빨간 머리 앤], <29. 새로운 경험>


끊임없이 수다를 떨던 앤은 열세살을 넘어가는 '틴에이저'가 되면서 말수가 다소 줄었는데, 서구에서는 '-teen'으로 끝나는 13세부터 19세까지가 'Teenager'라 하니 우리로 치면 '사춘기'가 되었는지 마릴라 아주머니한테 제법 어른스러운 말과 표정을 지어주기도 한다. 그리고는 근엄하게 한 마디 덧붙여주시는 것도 잊지 않는다. "키는 이만큼 컸지만 저는 여전히 앤이에요."라고.





"마릴라는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말끝에 한숨을 내쉬었다. 앤이 자란 걸 보니 왠지 모를 아쉬움이 느껴진 것이다. 자신에게 사랑을 가르쳐 준 아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지금 눈앞에는 진지한 눈빛과 사려 깊은 듯한 눈썹, 그리고 당당한 표정을 한 키 열다섯 살짜리 소녀가 서 있는 것이다."
- [빨간 머리 앤], <31. 시냇물과 강물이 만나는 곳>


'모태독신녀'로 알려진 마릴라 아주머니는 사실 앤의 수다개그와 상상개그를 핀잔은 하지만 일종의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한다. 그만큼 말수가 줄어들고 커가는 앤을 보며 무척 아쉬움을 표하기도 하고 앤이 애써 무시하려는 '훈남' 길버트의 아버지와의 젊은 시절 '썸'타던 얘기도 해준다.
자녀와 함께 크고 그만큼 변하는 부모의 모습이다.


"난 나 이외의 어느 누구도 되고 싶지 않아. 평생 동안 다이아몬드로 위로를 받지 못하게 된다 하더라도 말이야. 난 진주 목걸이를 한 초록 지붕 집의 앤이라는 사실이 너무 행복해. 매튜 아저씨가 분홍 드레스 부인의 보석보다 훨씬 더 깊은 사랑을 그 목걸이에 담아 주셨다는 걸 난 아니까."
- [빨간 머리 앤], <33. 호텔 발표회>


그래서 우리가 [빨간 머리 앤]을 보며 그 아이의 성장을 통해 배운 것은 미친 '상상력'과 주체못할 '개그욕심'만은 아니다. 바로 빨간 머리로는 결코 행복할 수 없고 주근깨에 빼빼 말라 미남과 결혼도 못할 것이며 이름마저 촌스러운 불완전한 본인을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자존감'이다. 본인 뿐 아니라, 자신을 만들어준 환경과 함께해 준 사람들과 그 힘으로 성장하는 '나' 이외의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는 힘이다.


"... 이제 그 이정표에는 모퉁이가 있네요. 그 모퉁이를 돌면 뭐가 있을지는 저도 몰라요. 하지만 좋은 일들이 있을 거라 믿을래요. 모퉁이 자체만으로도 매력적이에요."
- [빨간 머리 앤], <38. 모퉁이를 돌면>


매튜 아저씨가 심장병으로 죽은 후 대학 장학금까지 포기하며 마릴라 아주머니가 홀로 남은 프린스 에드워드 섬의 교사로 돌아오는 앤의 선택은 그렇기에 빛이 난다. 더 좋은 길을 가지 못한 아쉬움이나 불행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어릴 때는 하루에 열두번도 더 '불행'과 '행복', '절망'과 '희망'를 넘나들던 상상력의 천재가 생각하지 않을리는 없다. 다만 이제 열여섯살 다 큰 앤은 그 생각을 수다로 풀지 않고 더 멋진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승화하는 것이리라.
자신이 바라보던 이정표에서 '모퉁이'를 발견했고, 그 '모퉁이' 앞에서 두려워하거나 멈칫하는 대신 앤 특유의 '상상력'과 '개그'로 극복하는 것.
[노자]가 말한 "대직약굴(大直若屈)"의 [빨간 머리 앤]식 표현이다. 역시 '크고 곧은 길은 작게는 굽어보이는 법'일테니.


스스로를 모태로 창조했을 앤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자전적 이야기를 풀어냈을 몽고메리는 결국 '모퉁이를 돌며' 이야기를 끝낸다.


"그리고 길에는 언제나 모퉁이가 있는 법이다!"
- 루시 몽고메리


***

1. [빨간 머리 앤(Anne of Green Gable)], 루시 몽고메리, 최지현 옮김, <보물창고>, 2011.

2. [빨간 머리 앤], 루시 몽고메리, '소년소녀 세계명작문학', <훈민출판사>
3. [빨강 머리 앤], 몽고메리, <교원>, 2006.
4. [새의 선물], 은희경, <문학동네>,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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