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역사', '역사의 전쟁'
'전쟁의 역사', '역사의 전쟁'
- [미술관에서 만난 전쟁사], 이현우, <어바웃어북>, 2018.
"그러나 정작 나라 이름인 '프랑스(France)'는 '문화'적인 단어보다는 상당히 호전적인 단어에서 비롯됐다. '프랑스'의 어원이 되는 '프랑크(Frank)'란 단어는 원래 '도끼'란 뜻의 '프란시스카(francisca)'에서 나왔는데, 이는 중세시대 전쟁터에서 살상용으로 던지던 '전투용 도끼'를 의미하는 말이다. 이 '도끼'를 주로 사용하던 종족을 '프랑크족'이라 불렀는데, 이들이 오늘날 '프랑스'의 기반이 된 '프랑크' 왕국을 세운 민족이다."
- [미술관에서 만난 전쟁사], <1장>, 이현우.
서기 5세기 서로마 말기에는 이른바 '민족 대이동'으로 북쪽에서 '게르만'들이 따뜻하고 풍족한 남쪽으로 내려와 '용병'이 되어 점차 '제국'을 잠식했다. 이는 소규모 이동집단을 이루던 북방 민족들이 나름의 '사회발전단계'에 따라 정착과 농경을 주업으로 하게 되는 과정에서 더 중요한 건 인구가 급증하면서 발생한 것일 수 있고, 동쪽의 아시아 '제국'들에게 밀린 북방 '흉노' 등의 유목민족들에게 연쇄적으로 밀려 내려온 것일 수도 있겠다. '고트'족이든 '게르만'이든 아무튼 이 '프랑크'족이 로마에서 '용병'이 된 이유는 25년 '만기제대'하면 그 가족들이 로마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원래부터 시조 로물루스 무리배들의 전쟁과 약탈을 통해 건국한 '군부정권' 로마의 전술은 전차는 물론 보병대형을 갖춘 조직형 전투였는데, 전차는 '직진' 밖에 모르는 약점이 있었고 보병 '진법'은 결국 원거리 공격전술에 무너지게 되었던지 북방에서 온 '프랑크'족의 '도끼' 앞에 속수무책이었던 것 같다. 로마는 물론 이슬람권 '제국'들의 전투규칙은 '야만인'들이 던지는 '도끼', 즉 '프랑크(frank)'로 인해 연이은 패배를 당했단다. 물론, 이 '프랑크'들도 아시아 북방에서 작은 말을 몰고 360도 활을 쏘던 유목민들의 기동력에 밀려 쫓겨 내려왔던 것이지만 말이다. '도끼'를 무수히 집어던져 보병대형을 무너뜨린 후 뛰어들어 칼과 도끼로 난자하는 이 방식은 아마도 더 원거리의 화포가 도입되기 전까지는 강력한 '전술'이었겠지만, '문화'를 도입한 중세 유럽이 되면 '랜스(lance)'를 사용하는 '기사'의 비효율적 전술로 전환된다. 중세 유럽의 '기사'는 아시아 북방의 '철기병'과 달리 무거운 갑옷과 딸린 장비로 인한 기동력 '제로'였고 11세기 십자군 전쟁에서는 사라센의 기동력에 또 다시 무너진다. 물론, 이 모든 구닥다리 전술들 일체는 화약과 총의 도입과 발달로 인해 다 싹쓸이 당하겠지만 말이다.
미술이 아닌 사학 전공자로 유럽 미술관을 다니면서 [미술관에서 만난 전쟁사]를 쓴 이현우 기자는 '프랑크'족의 이 '도끼'가 우리말로 '돌직구'라고도 하는데, 영어로 "Frankly speaking"은 "솔직히 말해서"로 남아 있다. 재미있는 대목이다.
(다빈치가 그리다 만 '랜스-용병' 그림을 루벤스가 마저 그리다)
"'랜스(lance)'는 원래 기병들이 들고 다니는 창을 일컫는 말이었다. 흔히 중세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들에서 볼 수 있는 기사들의 마상 창 경기에서 말을 탄 기사들이 들고 나오는 기다란 창이 바로 '랜스'다... '프리랜서(free-lancer)'란 이 '랜스'에 소속되지 않은, 자기 혼자 왕이나 귀족과 일대일로 계약을 맺고 전쟁터에 나가는 '용병'을 일컫는 말이었다."
- 이현우, 같은책, <4장>.
'도끼(frank/francisca)'나 던지던 유럽인들이 기독교 이데올로기로 '문명화'된 중세는 '기사'의 시대였다. '랜스'라는 창과 갑옷으로 중무장한 그들은 혼자가 아니었다. 튼튼한 중무장 말도 몇 마리에 시종도 몇 명 따랐으며 전투에서는 보병부대도 거느렸다. 지금으로 치면 '장교'나 지휘관일 텐데, '랜스'는 '소규모 부대'를 이르는 말이 되었다. '기업'을 뜻하는 '컴퍼니(company)'의 어원이 이 '랜스'들을 모은 '용병 집단'이었다. 이 '기업(company)'들은 국왕이나 교황, 봉건영주들과 '자유 계약'을 맺고 '용병'인 '랜스'들을 보냈는데, 아마도 '기업'들이 서로 짜고 대충 전투 시늉만 내면서 고용자들로부터 '계약금'만 받고 '먹튀'도 했단다. 거대 기업들의 본질은 '경쟁'인 한편으로 '담합'이 될 수 밖에 없다. 자본주의 독점체제에서 최대로 강화된 이 '시장'에서 '경쟁'과 '담합'은 쌍둥이 형제다. 예나 지금이나 '자유 시장'은 허상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중세의 '컴퍼니'에서 독립하여 혼자 '계약'을 하던 '랜스'가 바로 '프리랜서(free-lancer)'다. [군주론]의 저자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이 '사기꾼' 같은 '프리랜서'들을 경계하라고 '군주'에게 제안했다는데, 마키아벨리식 '군주'의 군사력은 '국민군' 또는 '민병대' 형식이었지 '귀족'적 '기사'들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프리랜서'들은 유럽의 첫 종교전쟁이었던 17세기 초 '30년 전쟁'에서까지 활약했다. 물론, 고용주들은 여전히 '사기'를 당했단다.
저자 이현우는 미술관에서 '전쟁의 역사'를 발견하고 그림들 속에 담긴 전쟁 관련 내용들의 역사를 엮어간다. 여성의 전유물인 코르셋과 스타킹은 군복을 입기 위해 고안된 남성의 착용물이었고 '허쉬 초콜릿'은 고대 '육포'와 같은 전투식량 'D-레이션'이 시초이며 전쟁의 역사를 바꾼 '총'이 처음에는 장전시간이 오래 걸려 '칼'과 '창'에게 무참히 깨진 이야기 등 사소한 것들로부터 시작되는 '역사' 이야기다. [방구석 미술관]처럼 독자들에게 '쉽게' 다가가는 편한 방식도 있겠지만, '전쟁'이나 '음식'처럼 인류에게 친숙한 테마를 통해 '역사'를 돌아보는 것도 매우 흥미롭다.
"동북아시아에 도착하기 전에 고추는 어떤 여정을 거쳤을까? 중국 책을 읽다보면 남아메리카에서 태평양을 가로질러 필리핀 해역에서 북상하여 타이완 건너편 취안저우에 위풍당당하게 다다르는 항해도를 이따금 볼 수 있다. 그러나 고추가 갓 전파되었을 시기에 이렇게 태평양을 횡단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유럽을 경유하는 것 말고는 길이 없었다. 여하튼 중국, 한국, 일본이 고추가 마지막으로 전파된 지점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 [혁명의 맛], <9. 고추와 쓰촨 요리의 탄생>, 가쓰미 요이치.
인류의 '문명'은 '불'의 사용에서 시작한다. 서양의 프로메테우스나 동양의 신농씨가 '불'을 전수했고 우리 '부여(불이)'족과 중근동 조로아스터 등이 '불'을 숭배했던 유사 이래 많은 것이 발전했지만 그 중 최고는 '음식'의 발전이다. '생식'을 한 후 나머지 시간 동안 '소화'를 시키느라 아무 것도 못했을 원시 인류는 '화식'을 통해 '소화'를 금방 끝내고 나머지 시간에 '노동'을 하여 문명을 건설했다는 미국 인류학자 리처드 랭엄의 분석은 설득력 있다. '음식'을 만들어 먹는 [요리 본능] 또한 역사를 이끄는 힘으로 '요리의 역사'도 '전쟁' 못지 않게 무시못할 역사의 주제다. 이 모든 것은 '과학'의 역사와 맞닿는다.
일본의 미술감정가이자 요리평론가인 가쓰미 요이치는 중국 요리를 주제로 역사를 돌아보는데, 이 중 마오쩌뚱이 "매운 것을 먹지 않으면 혁명을 할 수 없다"고까지 말한 것처럼 한-중-일 아시아 삼국이 원래 매운 것을 먹어왔던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 또한 '역사'다. 중남아메리카에서 나온 고추씨가 어떤 경로로 아시아에 유입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16세기 네덜란드에서 일본으로 유입된 '음식' 고추가 임진왜란 '전쟁'을 통해 조선에 들어왔을 수도 있고 유럽에서 인도까지 전파된 고추가 인접 지역 사천성(쓰촨)으로 도입되어 '사천 요리'가 매운 것일 수도 있다. 동아시아에 고추를 '전파'한 일본은 여전히 '매운' 맛을 모르니 앞으로 '역사의 매운 맛'을 보여주는 것은 별론으로 하고. 아무튼, '음식'의 발전과 이동경로를 따라 '역사'를 살피는 것도 흥미로운데, '매운 혁명'을 했다는 중국의 '삼국지' 영웅들은 '매운' 맛을 몰랐으며, '작은 고추'를 뽐내며 신라면을 흡입하는 조선인들의 17세기 선배 실학자 [지봉유설] 이수광은 우리가 하루도 없이 못 사는 '고추'를 '독초'라 썼단다.
( 전함 '야마토' )
"무용지물 전함이었던 '야마토'의 최후는 비참했다. 1945년 오키나와로 미군이 몰려오자 '야마토' 전함은 마지막 임무를 부여받았다. 오키나와 해안에 도달해 고정 포대 역할을 하며 장렬히 전사하라는 것이다. 패전이 확실시된 상황에서 국민들에게 면목이 없으니 자살을 강요받은 셈이다. 적재된 연료도 오키나와까지 편도로 갈 만큼만 채워졌다고 한다... 전함 '야마토'는 일본을 비롯한 이른바 군국주의 전쟁광들의 페르소나일지도 모르겠다. 전쟁광들은 늘 대의를 위한 희생을 강요했고 강요당했다. 전함 '야마토'처럼 말이다."
- 이현우, 같은책, <2장>.
중학교 어린 시절에는 군부독재 '파시즘' 체제에 살아서 그런지, 2차 대전에서 독일의 '킹타이거' 전차와 일본의 '야마토' 전함, 항공모함 '아카기' 따위가 그렇게 멋져 보였다. 우리 '삼국시대'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고 기댈 곳 없던 '왜'가 '일본'이라는 국명을 채택하고 '독립'한 시기의 '야마토(大和)' 정권은 그들의 '근본'일텐데 세계 최대 전함 '야마토'는 2차 대전 당시 군국주의 일본 GDP의 1%나 쏟아부은 전함이다. 그러나 너무 커서 기름만 많이 먹고 느리며 일본 최초 '3연장 주포'는 포신 사이 거리가 너무 가까워 표적도 못 맞출 뿐더러 발사된 포탄이 어디로 날아갔는지 아무도 몰랐단다. 결국 최고위층 연회장이자 호텔로 쓰이던 중 태평양 전쟁 최후 해전에서 총알받이를 하다가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도끼'를 던지며 '제국'을 후리던 '프랑크', 최고의 기사 '랜스'들을 조직하여 절대권력자들과 계약하던 '컴퍼니', 세계 최대의 '전함호텔 야마토' 등 '전쟁의 역사'. 지금부터 5세기 전까지만 해도 '독초'였던 고추 없이는 지금은 하루도 못 사는 우리 '음식의 역사'는 매우 흥미롭다.
그러나 이 '역사'를 고정된 형태의 흥미거리로만 만난다면, 각자의 '역사'는 그 자체가 전쟁터다. 역사의 흥미로운 테마로서의 '전쟁'과 '음식' 등의 전장에서 '역사'를 이끌어 온 다수의 입장에 서서 그 경향성을 설정한 '역사의 전쟁'은 "원래 우리 역사는 이런 것"이라며 그 역사를 사유화하려는 소수 지배자들과의 싸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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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 칼 마르크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 선언],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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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술관에서 만난 전쟁사], 이현우, <어바웃어북>, 2018.
2. [방구석 미술관], 조원재, <블랙피쉬>, 2018.
3. [요리 본능(Catching Fire)](2009), 리처드 랭엄, 조현욱 옮김, <사이언스북스>, 2011.
4. [혁명의 맛](2009), 가쓰미 요이치, 임정은 옮김, <교양인>,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