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에 갇히다] / [책에서 나오다], SF 앤솔러지, <구픽>
여전히, 책에 갇히고 만다
- [책에 갇히다] / [책에서 나오다], SF 앤솔러지, <구픽>
1.
내가 '책'을 들고 다니기 시작했던 건 예닐곱 살 적부터였다.
그렇다고 그 나이부터 활자 읽기를 좋아했다는 말은 아니다. 내 손에 들려져 있던 건 주로는 공룡이 나오는 어린이 백과사전 같은 책이었다.
어릴적 어머니는 집에 혼자 남을 나를 위해 16절 갱지 한 묶음과 모나미 볼펜 한 다스를 주고는 일을 나가셨고 나는 어두운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들고 다니던 책을 펼치고는 공룡 따위 삽화들을 따라 그렸다.
어린 시절 내 꿈이 잠시 '고고학자'였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공룡은 그 나이 때 나만 좋아했던 건 아니었을 테지만, 우연히 우리 집에 공룡이 나오는 생물 대백과사전 비슷한 책이 있었고 글을 잘 몰랐을 취학 전의 나는 그 유일한 어린이책을 들고 다니며 공룡 그림을 들여다 보았을 것이며 그것들을 따라 그려대는 나를 보며 어머니는 내개 종이와 펜을 쥐어주었을 거다. 모자라지 않던 갱지와 모나미 볼펜은 어린 나의 친구였고 그 속에서 노닐던 수많은 공룡들과 얼마전 할머니집에 살 때 텔레비전에 빠져들어서 보던 마징가, 태권브이 같은 로봇들은 나에게 어렴풋이 '고고학'이나 '과학자' 같은 꿈을 막연히 새겼으리라.
책을 읽게 된 건 그 후로도 한참이나 지난 후였지만 나는 그 덕에 취학 전에 글을 읽을 줄 알게 되기는 했던 것 같다. 지금도 갱지의 냄새와 모나미 볼펜의 촉감은 내가 좋아하는 코드들이다.
스무살이 되었을 때, 내 손에는 여전히 '책'이 들려져 있었다.
대학에 들어가 전국 각지에서 모인 동기와 선배들을 보며 나도 모를 모종의 위축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 내가 선택한 게 아마도 '책'이었던 것 같다. 일종의 열등감 극복을 위한 차별전략이었을 텐데, 집안 형편도, 외모도, 말주변도, 그렇다고 지능도 변변치 않던 나는 항상 '책'을 손에 들고 다녔다. 그리고 전철이든 버스든 그 어디서든 읽었는데 어떨 때는 읽는 척도 많이 했다. 의도는 여러 가지였다. 뭔가 있어 보이려는 신비주의 전략이었고, 아무하고나 대화하지 않는다는 자기보호 수작이었으며, 환경을 주체적으로 주도하려는 작전이기도 했다. 타인들은 나를 늘 책을 들고 다니며 읽어대는 녀석으로 인식했고, 내성적인 나는 타인들과 있을 때 눈을 어디에다 두어야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으며, 내가 뭔가를 하고 싶거나 말하고 싶을 때 내 마음대로 책을 잠시 덮었다. 그러다가 다시 책을 펼치면, 나는 눈과 마음을 둘 곳이 자연스레 생겼고 더 이상 뻘쭘하거나 어색해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다보니 한편으로는 네모난 '책' 자체가 주는 물질적 만족감 같은 게 생겼다.
어릴 때와 달리 성년의 내게 네모진 '책'은 한 손에 딱 들어맞는 악세서리가 되었다. 21세기인 지금은 휴대폰이 들려져 있을 때도 많지만, 휴대폰이 없던 '90년대 초부터는 한 손에 딱 알맞춤한 그립감의 장신구이자 장난감이기도 했다.
그렇게 지금도 나는 한 손에 잡히는 '책'을 매우 사랑한다.
이 지식을 담은 장신구로서 '책'의 기원은 약 1,700년 역사의 '코덱스(codex)'다.
"코덱스의 편리함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서기 400년 경이 되자, 고전적인 형태의 두루마리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대부분의 책들은 사각형으로 여러 장 모은 형태로 제작되었다."
- [독서의 역사], <책의 형태>, 알베르토 망구엘.
서기 4백년대에는 소장하고 읽기 불편했던 두루마리 형태에서 양피지를 접어 지금의 책 형태로 만든 '코덱스'가 발명되었다. 동양의 죽간이나 서양의 두루마리는 원자재 자체가 고급이라 복제가 쉽지 않았을 테니 기원전 1세기 죽간본이었던 사마천의 [사기]만 해도 세 번 베껴서 분리보관했단다. 그러다가 상대적으로 대량보급이 가능했을 원자재인 동양의 종이나 서양의 양피지에 베껴쓰는 '코덱스(codex)', 즉 지금의 '책'은 개인 소장의 편리성과 유용성이 한층 용이한 형태로 변형되어 왔다.
'코덱스' 시대와 함께 '문자'와 '지식'은 비단 외우는 것만이 아니라 소지하고 다니며 그 권위를 인용할 수 있게 되었는데, 14세기에는 '안경'도 발명되었고, 드디어 15세기에는 구텐베르크의 인쇄기술이 [성경]의 대량생산과 대중화에 혁혁한 공을 세운다. 한편, 15세기 인쇄술의 대중화는 육필 필사본의 화려한 장식적 필체 또한 대중화했기에 16세기에는 인쇄술의 발전이 육필 필사의 기술도 함께 발전시키게 된다.
'책'의 주요한 역사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131
전자산업 발달에도 불구하고 '종이책' 고유의 양식과 질감, 냄새는 늘 인류와 함께 해왔다.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 알베르토 망구엘 또한 그랬던 것처럼, 사실 내게도 '독서'란 '문자'나 '지식'을 얻는 행위를 넘어 '책'이란 물질에 대한 일종의 '집착'이기도 하다.
지금도 한 손에 '책'이란 물질이 없으면 허전하다.
그렇게 나는 오랜 동안 '책'에 갇혔다.
2.
출판사 <구픽>은 며칠 전 '프롤레타리아 장르 단편선'이라는 신예 단편소설 선집(앤솔로지)으로 알게 되었다. 최근 수년 전 놓고 살았던 소설이 땡겨서 몇 권 읽어본 김에 검색해 보니, '책'에 관한 신예 작가들의 단편소설들을 엮은 선집이 두 권 보였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360
한 권은 [책에 갇히다](2021).
전자문명의 발달로 인해 '코덱스' 형태의 네모난 '책'이 사라질 위기에 처한지는 오래되었다. 그러나 아직 '책'이라는 물질을 통해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는 세대가 살아있다. 같은 세대라도 신문명 적응이 빠른 사람들은 어느새 빠르게 고전적 '책'을 폐기처분했겠지만, 나 같은 문명 부적응자는 마치 총포 앞에 검을 들고 선 사무라이처럼 무모하게 '책'이란 물질을 한 손에 집고 버틴다.
이처럼, 1,700년 역사와 전통의 '코덱스'로서 '책'을 지키는 건 일종의 문명전쟁의 성격도 있다. 그래서 [책에 갇히다]라는 주제로 모인 신예 소설가들의 영역은 대부분 SF다. 그렇다고 과학적이고 미래주의적이지만은 않다. 기왕에 닥쳐오기 시작한 '코덱스'와 물질적 '책'의 종말 앞에서 진정한 '책'을 찾기 위해 먼 길을 떠나지만 결국 오래전 그대로의 '책'을 찾지는 못하는 내용들이다. 물론 예상하다시피 물질적 '책'을 찾는 건 더 이상 불가능할 앞으로의 미래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진정한 '책'이 무엇일지 현재에 고민해 보자는 시도들로 가득하다. 전통적 형태의 '코덱스'로서 '책'에 갇혔지만, 그 '책'은 진정하고도 보편적인 '책'으로서 앞으로도 인류와 함께할 진리의 보고를 의미한다.
진리를 추구하는 한,
'책'은 영원하다.
'책'에 갇혔으니, 이제 나올 시간이다.
[책에서 나오다](2022)는 아예 대놓고 SF다. 주제 또한 'SF 작가의 고전 SF 오마주'로 잡았다. 신예 SF 작가들에게 주제를 던져주고 고전 SF 한 권을 선정하여 이와 관련한 SF 오마주 소설을 쓰게 해서 모았다. 예를 들어 전혜진 작가는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1818)을 뽑아 19세기 가부장제가 양산한 억압된 여성이라는 '괴물'을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또는 메리 셸리의 당시 일상으로 재구성하면서 보여준다. [프랑켄슈타인]에서 진짜 '괴물'은 피조물이 아니라 자신을 신문명 창조자로서 '프로메테우스'라고 믿었던 인간들의 확신과 오만이었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329
결국, [책에 갇히다]에서 [책에서 나오다]의 기획 속에서 나는 '책'의 영원성을 본다.
우리가 '갇혔던' 책은 '진리'와 동일자인 보편으로서의 '책'이었다.
한편, 우리가 '나오고'자 한 책은 결코 보편자로서의 '책'이 아닌, 개별적인 고전 SF 소설에서 그린 인류의 기존 문명이었다.
결론적으로,
우리에게 1,700년 동안 익숙했던 '코덱스'는 언젠가 사라질지라도,
현재 문명의 개별성을 극복하고 '나오면서' 보편적 진리의 담지자이자 전달자로서의 '책'에는 '갇힐' 수 밖에 없는 인류의 운명을 이야기한다.
3.
"스크립타 마네트(Scripta manet),
베르바 볼라트(Verba volat)"
중세 시대만 해도 '독서'는 눈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 입으로 소리내어 암송을 동시에 해야 했단다.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다수라 '신의 말씀'을 함께 읽고 들어야 했기 때문인데, 구텐베르크 인쇄 혁명을 통해 '문자'를 다수가 공유한 이후로 독자들은 어디에서든 혼자서도 조용히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글로 쓰여진 것은 영원히 남고, 말로 표현된 것은 공기 속으로 사라진다(Scripta manet, verba volta)"는 라틴어 문구는 원래, 중세 암송 시대에는 "글은 조용히 죽은 것이고, 말은 생생히 날아오른다"는 의미였다지만, 근대 이후 묵독 시대에는 "글은 영원히 남고, 말은 공허히 날아간다"는 뜻이 되어 '지식'을 공유함에 '문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문장이 되었다.
[독서의 역사]를 쓴 알베르토 망구엘에 의하면, 책은 '간단한 도구의 상징적 의미보다 훨씬 복잡한 상징적 의미를 독서가에게 부여'함으로써, '무지, 맹신, 지성, 기만, 교활함, 그리고 계몽을 통해 책읽는 사람은 원전과 똑같은 단어로 그 텍스트를 다시 쓰면서도 원본과는 다른 이름으로 재창조'한다고 말한다.
인류의 모든 문명은 문자로 남고 독자들은 다양한 상상력으로 그 문명을 발전시키기도 하고 퇴행시키기도 하지만 말이다.
인류와 '책'의 관계는 바로 이거다.
다수의 읽기와 쓰기를 통해 다양해지는 진리 추구로 소수의 지식과 정보 독점을 해체해 온 역사.
설령 '책'이라는 네모진 물질이 한 손에 착 감기는 그립감이 결국에 사라지고 말지언정,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온다는 역사에서도 진정한 '책' 찾기는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책'에 갇히고 만다.
***
1. [책에 갇히다], '책과 서점에 관한 SF 앤솔로지', <구픽>, 2021.
2. [책에서 나오다], SF 작가의 고전 SF 오마주, <구픽>, 2022.
3. [독서의 역사(A History of Reading)](1996), 알베르토 망구엘, 정명진 옮김, <세종>, 2000.
https://m.blog.naver.com/beatrice1007/223458341385?afterWebWrite=tr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