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환상특급] 시즌2, 1985~1989.
민약, 시간이 멈춘다면.
- [환상특급] 시즌2, 1985~1989.
1987년, 아니면 그 다음 해였던가.
토요일 늦은 오후 '황혼'(twilight)의 시간은,
'환상특급' 열차를 타고 '신비스럽거나 또는 초자연적인'(twilight) 어딘가로 돌아가는 시간이었다.
중학교 때 오락실에서 동전은 이미 떨어진지 오래되었고 구경이나 하다가 싫증나면 동네 구씨 형제네 집으로 놀러가곤 했다.
구씨 형제는 나보다 한 살 많은 태환이형과 나보다 한 해 아래인 태영이였는데, 두 살 터울의 그 형제의 어머니는 아마도 신용카드가 없던 1980년대 중반에 우리 어머니와 서로 현금을 융통해주던 모종의 '신용카드' 관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혹은 같은 계모임 회원이었거나.
아무튼 1987~8년 중학생이었던 나는 부모님이 일하러 나간 구씨 형제네 집에서 민화투도 치고 애거서 크리스티 장편 추리소설도 읽었으며 TV 드라마를 봤다.
화투 가지고 놀길 좋아하시는 내 어머니한테 배운 민화투를 내가 구씨 형제들한테 가르쳐줬는지 아니면 애초에 민화투를 구씨 형제한테서 배운 건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아마도 서로가 아는 규칙들을 조정하고 일반화시키면서 팔뚝이나 딱밤 맞기 내기로 민화투를 가끔 쳤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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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때 다른 친구네 집을 들락거리며 섭렵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단편 추리소설 시리즈를 넘어 중학교 때 영국의 애거서 크리스티와 미국의 엘러리 퀸의 장편 추리소설을 처음으로 읽게 된 것도 역시 구씨 형제의 방에서였다. 팬더 문양의 <해문출판사>에서 낸 그 장편 추리소설 시리즈들과 그 책들에 들어있던 로이 리히텐슈타인 풍의 미스테리한 미국식 삽화들이 지금도 아련하게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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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후에도 구씨 형제네 부모님께서는 여전히 일터에 계셨고, 1987년인가 1988년인가 당시 토요일 학교 끝나고 구씨 형제네 집에서 라면을 끓여먹고 나면 미국 드라마 [브이(V)]를 봤던 것 같다. 친한 척 하면서 지구를 방문한 파충류 외계인들이 사실은 지구를 점령하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외계인들의 정체를 알게 된 도노반과 줄리엣 같은 과학자 반군이 전력으로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 이들에 대항하여 독립해방투쟁을 실천하는 감동의 드라마였다. 나는 용감한 남자 주인공 도노반이나 여자 주인공인 외계인 총사령관 다이애나 보다는 또 하나의 여자 주인공인 반군측 줄리엣이 너무 예뻐서 넋을 잃고 보고는 했다. 그 여배우 이름이 페이 그란트(Faye Grant : 1957~)라는 건 이제서야 검색해보고 알았지만.
어쨌든 당시의 사춘기 남학생인 나는 줄리엣 상사병 같은 것도 걸렸던 것 같다.
그러다가 구씨네 어머니의 귀가가 좀 늦어져 그 집에서 줄리엣 후유증에 시달리느라 집에 갈 타이밍을 놓친 나는 같은 채널에서 이어서 방영하던 [환상특급]도 보게 된다.
[환상특급] 역시 1980년대 미국 드라마였는데, 내 어릴적 1980년대에는 평일 오후 TV 만화영화는 다 일본 만화였고, 토요일 오후 TV 외화는 죄다 미국 드라마였다. [브이], [맥가이버], [전격Z 작전], [에어울프], [머나먼 정글] 등등이 토요일 오후를 장식했지만 그 중 나는 [환상특급]을 제일 좋아했던 것 같다. [브이]는 오로지 줄리엣만 좋았던 거고.
"당신이 끝이라고 생각한 것이 사실은 시작이었습니다."
미국 작가 켄 제닝스의 [사후세계를 여행하는 모험가를 위한 안내서](2023)를 보면, [환상특급]의 <어둠 속의 공허> 에피소드 중 인격화된 '죽음(Mr. Death)'이 '죽음'을 안내하면서 한 말이라고 한다.
대부분 에피소드의 줄기는 이런 '환상'적 반전이다. 즉,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은 또다른 세계의 시작일 수 있으며, 이 '사후세계'는 종교적으로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중국의 도교와 동아시아적 샤머니즘이나 토테미즘처럼 우리 곁에 있는 그 무엇일 수 있다는 관념의 서양식 또는 미국식 표현이겠다.
죽음의 여객선을 탄 노부부들은 유령이나 귀신들이라기보다는 그저 내 주위를 스쳐 지나가는 평범한 이웃들과 같다. 그 누구도 이 배가 '사후세계'로 간다는 사실을 대놓고 알려주지 않는다. 그저 잘못 탑승한 젊은 부부가 스스로 알아서 구명보트를 타고 탈출해야 한다. '죽음'으로 향하는 그 시간은 경각을 다투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저 무덤덤하게 흘러가는 현실의 시간이다.
미처 탈출하지 못한 채 죽음의 문턱을 넘는다 해도 [환상특급]의 '사후세계'(The Great Beyond)로 간 나는 어디 먼 너머로 가는 것이 아니라 현실 가까운 그 어딘가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도 있겠다. 또는 죽음의 여객선 위의 젊은이가 어느새 옆에 있던 늙은이가 되어 버린다.
끝이라고 생각했던 '죽음'이 현실의 어딘가에서 새로 시작하는 또 다른 삶일 수 있는 거다.
저 멀리가 아닌 옆 동네 어딘가로 건너가 신선이 된 동양의 죽은 자는 늘 산 자의 곁을 맴돌며 그와 함께 새 삶을 시작하는 서양의 그 무엇이 된다.
현실과 '사후세계'의 경계는 모호하다.
[환상특급(The Twilight Zone)]은 미국의 방송제작자이자 각본 작가인 로드 설링(Rod Sirling)의 TV 단편드라마 시리즈라고 하는데, 이어지는 연속극이 아니라 매주 토요일 늦은 오후에 한 두편씩 하는 단편 에피소드들이었다. 내용은 현실에선 낯선 환상의 세계나 현실의 이면 또는 곁에서 도사리는 공포나 호러, 죽음과 사후세계 같은 기묘한 이야기들이었다. 과학적 모티브는 있었겠지만 그리 과학적이지도, 그렇다고 종교적이거나 신화적인 주제도 아니었다. 그저 현실의 우리가 잊고 살지만 항상 우리 곁에 있을 법한 온갖 환상적인 이야기들로 상상의 세계가 잠시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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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들을 다 보지도 못했을 뿐더러 본 것들 조차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지만, 어린 중학생이었던 내게 인상깊었던 에피소드 하나는 시간이 멈추는 환상 이야기였다. 어떤 계기가 되면 나만 빼고 모든 것이 정지되는 순간이 온다. 그 '얼음/땡'의 반복 후 시간의 흐름이 어떻게 되었는지 설명 같은 건 없다. 그냥 나 빼고 다 멈춘 채 정지되었으니 시간이 멈춘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주인공은 처음에 시간이 멈추었을 때 신이 난 듯 장난도 쳐보았지만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정지되곤 하는 시간 속에서 무료함과 무력감을 느끼다가 종국에는 이제 그만 좀 하라고 절규하면서 끝났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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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과학에서는 시공간을 구부리고 겹쳐버리는 '상대성 이론'과 이를 초월하기도 하는 '양자역학'을 통해 보듯 오래된 뉴턴식 절대적 시간관은 붕괴된지 오래지만, 짧은 생을 잠시 스치듯 사는 우리 개인에게 '시간'이란 다시 되돌아가거나 붙잡아 둘 수 없는 불가역적인 '절대적' 존재다. 그래서 유한한 나는 오래전 토요일 늦은 오후의 [환상특급] 에피소드 이후 35년 넘게 '만약 시간이 멈춘다면?'이란 말도 안되는 가정을 가끔씩 혼자 해보곤 한다.
시간 없어 가보지 못한 공간을 가보거나 하지 못한 일들을 해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만 알지 다시 흐르게 할 방법 같은 건 모른다. 혹시 내 의지대로 시간을 움직일 수 있다 한들 전지전능한 신이 아닌 내가 정지된 듯한 시간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이 있을 수 있을까 싶다. 어차피 인간관계 속에서 서로 부대끼며 함께 살지 않는 한 그 삶의 시간은 거의 정지된 거나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말이다.
빛의 속도로 이동할 수 없는 우리들 개개인 누구에게나 시간은 공평하고 평등하다.
그래도 만약,
시간이 멈춘다면,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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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후세계를 여행하는 모험가를 위한 안내서](2023), 켄 제닝스, 고연석 옮김, <세종>,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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