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리얼리즘'으로서의 '개그'
나의 '리얼리즘'으로서의 '개그'
- [깊은 잠(The Big Sleep)], 레이먼드 챈들러, 1939.
"나는 아주 영리한 사람이오. 감정도 없고 양심의 가책도 없지. 오로지 아쉬운 것은 돈뿐이라고... 그 돈에 내 인생을 걸고 경찰들이나 에디 마스와 그 부하들한테 미움 사는 일도 감내하며 총탄에 돌진하고 곤봉에 머리를 얻어 맞고 (돈많은 의뢰인인) 당신 같은 사람에게도 고맙다고 하는 거요... 그런데 그렇게 하려다 보니 나 자신은 개자식이 되는군. 괜찮소. 별로 신경쓰진 않으니까."
- [빅 슬립], <32>, 레이먼드 챈들러, 1939.
1.
어린 시절, 오락실에서 아주 살았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는 말에게 당시의 나는 진심이었다. 등교길과 하교길에 무조건 들렀다. 돈은 없었으니 어쩌다 운좋게 주머니에 동전이 있으면 한판 50원 하던 게임 몇 판을 했지만, 어머니가 주신 용돈을 초반에 오락실에서 탕진하고는 대부분 빈털터리로 살던 나는 오락실의 '그림'을 주로 보러 갔다.
미술과 그림을 좋아하긴 했던 나는 이론은 몰랐거나 아예 그런 게 있는지 조차 몰랐으니 가장 가까이에서 언제든 갈 수 있던 오락실에서 '그림 감상'을 했다. 더 어렸던 시절 1970년대 인천 십정동 할머니의 화투장 그림에서 시작했던 나의 '미술관'은 1980년대 들어 서울 이문동의 어머니 서랍속 화투장 그림에서 우연히 다시 열렸고 노년의 지금과 달리 한창 일하던 젊은 시절의 어머니는 어린 내가 화투장 들여다 보는 걸 금지하셨다. 결국 나는 아버지가 '남자는 이것저것 해봐야 한다'고 하시며 집에만 틀어박혀 있던 나를 처음 데려가서 갤러그를 처음 시켜줬던 오락실을 혼자 가게 되었다.
오락실이 나를 이끌었던 이유는 '게임'이 아니라 '그림'이었다.
그러던 1985년에 나는 동양의 화투그림 또는 서양의 팝아트 따위를 연상시키던 운명의 '너클 죠'를 만났다. 본격적으로 '나만의 오락실 미술관'은 그렇게 문을 열었다.
2.
오락실에서 그림감상을 하던 나는 중학교 2학년이었던 1988년에 오락실 들렀다가 거기서 만난 동네 구씨 형제네 집에 가서 라면을 얻어먹었고 민화투를 배웠다. 부모님이 일나간 오후의 구씨 형제 빈집에서 나는 그렇게도 좋아하는 화투그림을 실컷 보았고 그조차 질려서 19세기말 애거서 크리스티의 장편 추리소설을 처음 읽었으며 엘러리 퀸을 비롯한 20세기초 미국 추리소설을 읽어보았다. 나보다 한살 많고 또 한살 어린 동네친구 구씨 형제는 전혀 책을 읽지 않았지만 기이하게도 그 형제의 방 책꽂이에는 팬더 로고의 해문출판사에서 나온 영미 추리소설이 몇 권 있었다. 물론 그 책들을 사주었을 것으로 추리되던, 내가 한번도 뵙지 못한 구씨 형제의 아버지께서는 꽤 두꺼운 포르노잡지를 아들형제의 책꽂이에 같이 꽂아둘 만큼 대담하시진 않았다. 나는 구씨 형제의 노력 덕택에 그 집 다락방 어느 구석에 수줍게 숨어있던 아주 두꺼운 미국 포르노잡지라는 걸 생전 처음 볼 수도 있었다. 여섯식구 중 여자가 넷인 집에 살았던 난 너무도 당연한 얘기긴 하겠지만 여자의 성기가 그렇게 생긴 건지 그 미국 포르노잡지에서 처음 보았다.
어린 시절의 나를 지배했던 주요한 감각은 시각이었다. 나중에 '시각예술(Visual Art)' 분류로 알게 된 '그림'이 어린 나의 주된 관심사였던 것 같다.
해문출판사에서 나온 미국 추리소설의 삽화는 미국의 화가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 풍의 '팝아트(pop-art)' 류의 그림이었다. 20세기초 미국의 DC 코믹스를 통해 등장한 배트맨과 수퍼맨 따위의 만화들 장면을 미술작품처럼 그려서 대량으로 찍어낸 후 대중유통하는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미술상품 생산방식이다.우리나라 삼성재벌 회장 같은 요즘 자본가 집안 미술 컬렉션에서 수십억에 거래될 리히텐슈타인의 팝아트는 아마도 20세기초 미국 신흥자본주의에서는 '페이퍼백' 책처럼 박리다매 마케팅을 그 유통의 기원으로 한다. 초기에는 미술유통의 혁명이었을 팝아트 또한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면 그토록 경멸했을 소수 지배계급의 매혹적인 포로가 되어 버린다. 생계와 연결된 예술의 숙명이다.
3.
리히텐슈타인 풍의 미국식 '팝아트' 그림을 떠올릴 때마다 내 머릿속에는 중절모를 쓰고 권총을 든 백인남성과 삐딱구두를 신은 금발의 아가씨가 헤집고 다니는 미국의 대도시가 겹쳐지는데, 1980년대 해문출판사의 문고판 미국 추리소설 덕분이다. 책 뒷표지의 목록에서 보았을 [몰타의 매]나 [깊은 잠] 등속의 소설을 당시에는 직접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그 삽화들 자체가 미국식 팝아트의 향연이었을 것으로 상상한다. 실제로 그렇지 않았다 한들 상관없다. 나는 미국의 사립탐정 필립 말로의 활약과 함께 연상되는 머릿속 팝아트의 전시관이 그리 싫지는 않다.
자본주의 체제는 경멸하지만, 일본의 1970년대 자본주의적 영웅 그레이트 마징가를 좋아하는 나는, 가진 게 돈밖에 없는 의뢰인들을 맘껏 비웃으며 대도시를 활보하고 모험하는 탐정 필립 말로와 함께 연상되는 미국식 팝아트 그림도 좋아한다. 아마도 그 기원은 원색의 화투그림일 테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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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는 나를 향해 빙글 돌았다. 전통있는 학교의 신사들처럼 그가 한두발 더 쏘게 해주었다면 멋졌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의 총구는 여전히 들려 있었고 나는 더이상 오래 기다릴 수 없었다. 전통있는 학교의 신사가 되기에는 시간이 모자랐다."
- [깊은 잠], <29>, 레이먼드 챈들러, 1939.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식의 개그 또한 팝아트 못지 않게 난무한다.
1930년대 미국의 '하드보일드(hard-boiled)' 추리소설의 거장 레이먼드 챈들러(Raymond Chandler : 1888~1959)의 대표작 [깊은 잠(The Big Sleep)](1939)의 주인공인 사립탐정 필립 말로(Philip Marlowe)는 본인을 향해 대놓고 "당신도 양아치인가요?"라 묻는 매혹적인 여성에게 "나도 양아치오"라고 숨도 안쉬고 바로 인정한다. 상대방이 총으로 위협하는 순간에도 상대방이 모르지만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본인이 가진 정보를 믿고 협잡하며 끊임없이 개그를 날린다. 모든 여자는 사실 멋진 외모보다는 용기와 개그를 남자의 최고 덕목으로 본다는 잘생기지 못한 우리 남자 부류들의 신앙이 맞을 수도 있다는 대목인데 실제로 소설 [깊은 잠]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여자들은 이 양아치 탐정 필립 말로를 경멸하는 척 하면서 동시에 끌린다. 물론 말로가 외모도 잘생겼으며 키도 180센치 중반이라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궁지에 몰려 피를 흘리면서도 끊임없이 개그를 나불대는 말로를 몰래 풀어주던 '은빛 가발의 여인' 모나 마스는 '숨쉴 때마다 농담을 해대는' 그 입 좀 다물고 열심히 두시간 쯤 도망치면 살 수 있다는 식의 충고를 잊지 않는데 그녀가 말로에 끌려서 풀어준 주된 이유가 아마도 그의 가늘고 긴 개그정신에 기인한 것은 아닌가 추정된다.
[깊은 잠]에서 말로가 부유한 의뢰인 스턴우드 장군의 명시적 의뢰가 없었음에도 사라진 장군의 사위 러스티 리건을 찾는 이유도, 그 과정도 명확하게 와닿지는 않는다. 고전 추리소설의 탐정들의 연역적이고 논리적인 추리기법은 필립 말로와 같은 자본주의 대도시 프롤레타리아 탐정에게는 사치다. 지방검사 수사관보였지만 상명하복 따위는 술 한잔으로 털어버리고 줄담배 연기에 비아냥을 썪어 내뱉어대다가 쫓겨나 사립 탐정사무소를 차린 그는 일거리가 떨어질까봐 불안해서 휴가도 못가고 일당 25달러에 기름값과 술값 같은 경비에 목숨을 거는 철저한 프롤레타리아지만, '개그'라는 인류의 아주 중요한 유산을 가늘고도 질기게 이어가는 위인이다.
험프리 보가트가 주연했다는 영화는 보지 못했지만 절체절명의 위기 순간에도 어쩌면 유언이 될지도 모르는 자잘한 개그를 상대방에게 남기는 이 위대한 정신은 어쩌면 007 같은 영화에서도 언뜻 본 듯 하기도 하고, 아마도 그 최극강은 영화 [데드풀]이 쉬지않고 날리는 개그에서 발견할 수 있다.
어떤 개그를 유언으로 남길까 가끔 고민하는 내가 사실 살고 싶은 삶이기도 하다. 아쉽게도 내게는 말로나 데드풀 같이 소설이나 영화같은 담대한 용기가 부족하니 언제 한 번 오즈에서 도로시와 방금 헤어진 사자를 만나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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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의 소설기법이라는 '하드보일드'는 계란 완숙노른자처럼 딱딱하고 비정하며 냉혹한 현실을 묘사한 '리얼리즘'의 일종이지만 지천명을 2년 더 넘긴 추리소설가 레이먼드 챈들러의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은 이런 '리얼리즘'은 위스키와 줄담배, 총소리와 개그로 날려버린다. 세부묘사는 추상적이라 독자가 따라잡기 쉽지 않기도 하지만, 결국 자본주의 대도시 삶의 현실을 생생하게 구현하는 '리얼리즘'을 담아낸다.
5.
만일 내가 소싯적부터 도박을 잘 했거나 게임에 일가견이 있었다면, 아마도 지금의 나는 모든걸 탕진한 빈털터리 술주정뱅이가 되었거나 차가운 감옥방 또는 서늘한 오동나무 관 속에서 '깊은 잠'을 자고 있었을는지도 모르겠다.
오락실에서 아예 살던 나는, 그러나 다행히도 이미 빈털터리였고 간도 작아서 게임이나 도박에는 도전도 못해보고 오로지 '그림'만 구경했다. 고스톱은 아주 가끔 늙은 어머니와 점백으로 치기는 하지만 번번이 잃기 일쑤고, 테트리스는 한판에 99판 세시간반 기록이 있고 비행기 오락은 곧잘 했지만 그 외에 오락실에 자주 간 이유는 '팝아트'와 같은 오락 '그림' 하나하나에 이끌렸기 때문이었다.
물론 컴퓨터 게임 좀 그만하라는 내게 고딩아들이 "그러는 아버지는 제 나이 때 과연 어떠셨습니까?"라고 작정하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그림감상'을 위해 오락실에서 주로 살았다는 답변은 부자지간에서는 뭔가 궁색할 게 뻔하다.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이 냉혹한 당대 현실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리얼리즘'은 아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날려대는 얄미운 개그를 통해 결국 비정한 자본가계급과 이들의 뒤를 닦아주면서 뽑을 건 뽑아먹고는 비아냥대는 프롤레타리아 탐정, 부패한 계급을 따라 탐욕과 욕정에 몸을 맡기다가 지배계급을 대신하여 타락의 희생양이 되는 팜므파탈 여성을 통해 부조리한 현실의 단면을 폭로하는 '리얼리즘'은 구현하고 있다.
나에게 '하드보일드' 추리소설과 함께 늘 따라붙는 '팝아트' 이미지 또한 실제 만화가보다도 못한 그림 솜씨일지언정 '시각예술'로서의 '그림'을 대중화시키기 위한 예술적 '리얼리즘'의 한 형태로 언제나 각인되어 있다.
그 '리얼리즘'은 재벌들이 몇백억을 들여 원작을 소유하든 말든 상관없이 존재하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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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빅 슬립(The Big Sleep)](1939), Raymond Chandler, 박현주 옮김, <북하우스>, 2004.
2. [범죄소설의 계보학], 계정민, <소나무>, 2018.
3.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의 1960년대 '팝아트(Pop-art)' 그림들 인터넷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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