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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Mar 14. 2020

[설국열차;Snow-Piercer] - 봉준호

'체제 외 혁명'의 단절성, '체제 내 혁명'의 무한성

영화평) [설국열차] - 봉준호 (2013)

- '체제 외 혁명'의 단절성, '체제 내 혁명'의무한성
 
 
 "지옥의 가장 암울한 자리는 도덕적 위기의 순간에 중립을 지킨 자들을 위해 예비되어 있다."
 - 댄 브라운의 [인페르노] 중 단테의 [신곡] 인용구
 
 
기차가 ‘정상 철로’를 이탈하여 뒤집어진 후 요나와 어린아이가 ‘빙하기’의 세상으로 나왔는데 북극곰이 보인다. 생명이 존재할 수 없다고 알았고 기차 밖으로 나가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배웠는데 아니었다. 어떤 사람은 “그래서?”라고 물었다 하고 어떤 사람은 ‘희망’을 보았다 하지만, 나는 ‘단절’을 보았다. 이제 인류는 이 ‘빙하기’라는 대자연을 딛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 당장 먹을 것과 잘 곳을 찾아야 할 것이다. 당연시 되던 체제를 깨고 나가는 것은 결국 ‘단절’에서 시작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 해도 이 정도의 ‘단절’은 우리의 사회과학으로 풀어나가기에는 너무도 광범위하고 막연하기만 하다.
 
[설국열차]는 지구 환경을 지키기 위해 살포된 물질로 인해 오히려 ‘빙하기’를 맞은 지구를 매년 한 바퀴씩 도는 기차가 주요 무대이다. 기차의 ‘주인’은 윌포드와 그의 엔진. ‘빙하기’로부터 살기 위해 기차에 탄 ‘마지막 인류’는 두 개의 계급으로 나뉜다. ‘머리칸’과 ‘꼬리칸’. ‘머리칸’에서 호의호식하는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그 ‘자리’를 지키는지 알 수는 없지만, ‘꼬리칸’에서 바퀴벌레로 만든 단백질 블록으로 연명하는 비참한 사람들은 ‘무임승차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혁명 지도자 커티스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은 꼬리칸에 타자마자 모든 것을 빼앗겼고 그들끼리 서로 잡아먹는 아비규환 속에서 살아왔다. 비인간적인 대우를 참지 못한 사람들은 ‘주기적으로’ 반란을 일으키는데 그 정신적 지주는 지옥 같은 ‘꼬리칸’에서 휴머니즘을 가르쳤던 길리엄이라는 위인이다. 길리엄을 배후에 두고 커티스가 지도하는 이번 혁명은 4년 전 ‘맥그리거 반란’보다 더 발전하여 윌포드의 엔진까지 장악하게 되는데 윌포드에 의하면 이러한 반란은 폐쇄된 기차 내 ‘균형’을 맞추기 위해 윌포드와 길리엄의 협력 하에 ‘주기적으로’ 조장되어 왔으며 이러한 ‘주기적 반란’으로 기차 내 혹은 ‘꼬리칸’ 인구의 70% 이상이 사라짐으로써 인구의 균형이 이루어진다.
한편으로 오로지 윌포드 엔진 장악만을 목표로 하는 커티스는 열차칸의 문을 열기 위해 보안설계자 남궁민수의 도움을 받게 되는데 ‘크로놀’에 집착하는 남궁민수의 목표는 결국 기차 밖으로 나가는 것이며 ‘크로놀’이라는 인화물질은 종국에 기차벽을 깨부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혁명의 두 가지 관점을 보는데, 즉 ‘체제 외 혁명’과 ‘체제 내 혁명’이다. 남궁민수의 혁명은 ‘체제 외 혁명’이고 커티스 또는 ‘주기적’ 혁명은 ‘체제 내 혁명’인 바, 전자는 ‘단절’을 특징으로 하고 후자는 ‘무한반복’을 그 특징으로 한다.
 
[설국열차]에서 ‘체제 외 혁명의 단절성’은 너무도 극적이고 극단적이어서 우리는 또 다른 인류의 출현을 몇 백만년이든 기다려야 할 상황까지도 설정해야 하지만 역사발전 단계에서 ‘체제간 단절과 연속’은 필연의 계기일 것이고, ‘체제 내 혁명의 무한성’은 장면마다 드라마틱함에도 불구하고 큰 줄기 자체는 체제 질서 유지의 각본에 너무도 충실한 나머지 현 체제의 권력이나 자본으로 상징될 수 있는 ‘엔진’을 장악한 후 더 이상 할 일이 막연해 지지만 그래도 조금씩 ‘체제의 역사가 무한히 전진한다’는 위안은 삼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양자간 한 가지 공통점은 그 어느 것도 계획한 대로 종결되지 않으며 그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역사’가 흘러간다는 것일텐데, 이런 식의 결론이라면 여러 ‘체제’들의 연속인 ‘인류의 역사’가 너무 기계주의적이고 진화론적으로 흘러 결국 헤겔이 말한 ‘역사의 간지’만 남을 것이다. 그러니 거창한 역사는 차치하고 어떤 선택을 하든 허무하게 죽어나가는 ‘도덕적 위기의 순간’의 설정 속에서 행운아가 아닌 다수는 ‘중립’이 아닌 무엇을 택해야 할 것인가. ‘꼬리칸’인가 ‘머리칸’인가, ‘체제 외’인가 ‘체제 내’인가.
 
적어도 ‘체제 외 혁명’인가 ‘체제 내 혁명’인가는 애당초 주체의 설정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이 또한 결국 ‘혁명’의 전개 과정에서 객관적 조건에 의해 규정되는 것 아닐는지 모를 일이다.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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