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하루의 이야기
손열음 피아니스트의 리사이틀 독주회에 다녀왔다. ‘리사이틀recital’은 영단어 ‘리사이트recite-암송하다’에서 파생한 단어로, 본디 성서를 외워 낭독하는 행위를 뜻했다. 이 표현을 처음 연주회에 접목한 것은 ‘초절기교’로 유명한 프란츠 리스트다. 그는 1840년 런던 무대에서 악보를 통째로 외워 마치 재즈처럼 자유로운 피아노 연주를 펼쳤다. 이후, ‘리사이틀’은 피아니스트가 평소 좋아하는 곡들을 악보 없이 고유의 색깔로 연주하는 공연의 대명사로 쓰였는데, 요즘에 와서는 그냥 ‘개인 발표회’ 정도의 의미로 활용되고 있는 모양이다.
이번 손열음의 피아노 리사이틀은 그 원초적 의미를 되살린 연주회였다. 2시간 반 넘도록, 손열음은 악보 없이 커다란 공간에 무수한 음들을 수놓았다. 다른 악기의 간섭 없이 오직 손열음의 피아노 음만을 현장에서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베토벤의 변주곡으로 시작된 연주는 베토벤의 제자 체르니로 이어지고, 다시 체르니의 제자 리스트로, 리스트의 제자 질로티로, 질로티의 제자 라흐마니노프로 이어졌다. 이는 마치 신약 성경의 “이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를 낳고…”라는 구절과 닮은 형식이다. 구성과 연주 모두에서 ‘리사이틀’의 원형을 복원한 셈이다.
내가 앉은 1층 자리는 피아니스트의 배면 대각선상에 있어, 건반을 누르는 손가락이 생생하게 보였다. 10개의 손가락이 펼쳐내는 200여 년의 시대와 그 갈피의 무수한 계절을 여행할 수 있었다. ‘소리’라는 것은 우주의 시작과 함께 탄생한 것이다. 지극히 원초적인 것에는 그리움과 슬픔이 녹아 있다. 나는 오래전 가을에 혼자 파리의 거리를 거닐었던 때를 떠올렸는데, 피아노 선율이 그날의 실바람처럼 느껴졌다. 인생의 단 하루만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파리의 몽소역에 도착하던 순간을 선택할 것이고, 사랑했던 이와 그 도시에 영원히 머무를 것이었다. 절정의 예술은 영원을 꿈꾸게 한다.
네 번의 앙코르를 끝으로 연주회가 끝나고, 예술의 전당 광장으로 나오자 밤이었다. 먹구름에 가려 별은 보이지 않았다. 가보지 않은 골목길을 지나 지하철역으로 터덜터덜 걸었다. 긴 사랑의 시절이 끝난 뒤, 수년간 혼자 공연장을 가는 일은 영 내키지 않았다. 마치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기처럼, 이제서야 다시 혼자의 삶을 익혀가고 있다. 별로 그러고 싶지는 않지만.
2024. 10.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