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알베르토 씨는 지금 막 '지구생명국제심포지엄'에 참가하고 오는 길이다. 알베르토 씨는 심포지엄에서 <인간중심주의를 넘어, 생명주의로>라는 주제발표를 했다. 평소 동양철학에 조예가 깊던 알베르토 씨는 노자의 자연주의 철학과 양자역학을 바탕으로, 서구 유럽의 휴머니즘을 극복하는 방안을 연구 중이었다. 알베르토 씨는 결국 노자를 바탕으로 독특한 물철학, 이른바 워터필로소피의 기초를 마련했다.
워터필로소피의 요점은 모든 생명체에는 물이 깃들어 있으며, 물을 함유하고 있는 존재는 모두 인간과 동등한 생명으로서의 존엄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알베르토 씨는 우주 역시 물로 파악한다. 그에 의하면 우주의 모든 별은 허공에 떠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라는 거대한 바다 속에 잠겨 있다는 것이다. 생명은 모두 물로부터 나와 물로 이루어지고 물을 섭취해야 살아갈 수 있다. 생명의 근본이 이러한데 생명의 확장체인 우주 역시 다를 수는 없다는 것이 알베르토 씨의 생각이다. 또한 알베르토 씨는 물이 없으면 결국 모두 죽는다는 점에서 모든 존재는 궁극적으로 같은 지점에 있으며, 서로 닮은 자매형제라고도 말한다.
물이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동안 여러 과학자들에 의해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이 사실에 착안해 알베르토 씨는 물은 생명체를 관통하는 경계 없는 모든 생명의 초자아라고 주장한다. 즉 물이 이 지구를 돌며 모든 생명의 데이터를 기억하고 수집하여 바다라는 거대한 지구의 해마에 담아둔다는 것이다. 알베르토 씨는 바다야말로 모든 생명의 집결지인 천국이며, 윤회가 발생하는 곳이라고 본다.
알베르토 씨는 또 모든 존재의 구성이 전지와 같다고도 말한다. 신체기관의 차이를 배제하고 모든 생명체의 구조를 단순화시키면, 생명체란 물을 담은 하나의 상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상자에 전기적인 에너지가 보급될 때 생명활동이 일어나고 전기에너지 공급이 중단되면 생명활동은 정지한다. 상자 속의 물은 소프트웨어, 상자(표피)는 하드웨어에 해당된다.
알베르토 씨는 이런 일련의 연구를 통해 불교적인 진리인 무아론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동물이나 식물에는 영혼이 없다는 기독교적 사상에 비판을 가했다. 알베르토 씨는 이어서 인간과 다른 생명을 경계 짓는 휴머니즘이 지구의 위기를 초래했다고 지적하며, 이제는 모든 생명을 워터필로소피의 이론을 바탕으로 동등한 레벨로 바라봐야 한다고 토로하여 기립박수를 받았다.
알베르토 씨는 집에 돌아오는 길에 문득 에스프레소 한 잔이 그리워진다. 늘 가곤 하던 커피하우스 자뎅의 문을 민다.
“에스프레소 투 샷이요.”
“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대로 교육받은 점원의 인사에 알베르토 씨도 점잖게 미소를 보낸다. 에스프레소를 받아 들고 거품이 깨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자리로 향한다. 알베르토 씨는 야외의 테이블에서 선선한 바람과 다사로운 햇살을 벗 삼아 커피를 마시는 일을 즐긴다. 오늘도 변함없이 야외의 테이블. 바람이 불어와 슬쩍 에스프레소 거품에 금을 긋는다.
“허허, 녀석.”
알베르토 씨는 마치 바람이 일부러 장난이라도 한 양 피식 웃는다. 한 모금 마셔본다. 혀끝부터 차곡차곡 올라오는 에스프레소의 풍미라니. 10월의 단풍빛 바람이 낙엽과 함께 입안에서 뒹군다.
“으음........ 좋군.........”
알베르토 씨는 잔을 내려놓고 지그시 눈을 감는다. 햇살이 가닐가닐 눈두덩을 간질댄다. 맑은 웃음이 알베르토 씨의 입가에 함박 피어난다. 위이잉~. 어디선가 반갑지 않은 소리가 들려 알베르토 씨는 눈을 떴다.
“저기요. 선생님, 여깁니다. 제가 너무 배가 고파 그런데 한 모금만 마시면 안 되겠습니까?”
파리 씨다. 파리 씨가 알베르토 씨의 에스프레소 잔 앞에서 두 손을 싹싹 빌며 애원하고 있었다. 알베르토 씨가 헛기침을 했다.
“어흠 어흠. 으음... 파리 씨군요. 반갑습니다. 오늘 날씨가 참 좋군요. 그런데 지금 뭐라고 하셨죠? 다시 한 번만 더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알베르토 씨는 특유의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 말했다.
“배가 너무 고픕니다. 도와주십쇼. 한 모금만 입니다.”
“손은 씻으셨소?”
“아 네, 물론입니다. 선생님, 방금 점에 화장실에 있다가 오는 길입니다.”
화장실이라는 말에 알베르토 씨의 눈썹이 흠칫 놀라버렸다.
“세면대에서 씻으셨소?”
“아, 저기 그게......”
“양심에 손을 얹고 말하시오!”
알베르토 씨는 약간 미소를 걷으며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선생님. 하지만 그 물은 깨끗한 물이었습니다. 다시 화장실까지 다녀올 기력이 없습니다.”
알베르토 씨는 생각에 잠겼다. 이 파리 역시 나의 자매형제이고, 궁극적으로는 또 다른 나이다. 그렇다면 나는 파리를 도와주는 것이 마땅하리라. 하지만.......
“이봐요, 파리 씨. 당신들은 어째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거저먹으려고만 하는 거요? 나는 오늘도 나의 학생들에게 열정적인 강의를 하고 얻은 강의료로 이 한 잔의 에스프레소를 산 것이오. 그리고 나는 모처럼만의 휴식을 즐기고 있었지. 그런데 당신은 내게 양해도 구하지 않고 무례하게 테이블 위에 올라섰고, 나의 휴식을 방한 주제에 공짜로 이 커피까지 원하고 있는 것이오. 내가 당신을 도와주어야 할 이유가 대체 무엇이 있단 말이오?”
“옳은 말씀입니다, 선생님. 제가 염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선생님의 테이블에 찾아온 것은, 몇 시간 전에 요 앞 싱글벙글 마트에서 TV를 통해 선생님의 생명주의에 관한 주제발표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은 까닭입니다. 특히 선생님께서 ‘저는 제 손으로 태어나서 파리를 한 마리도 죽인 일이 없습니다. 그들은 저의 자매형제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철없는 동생이 여러분의 앞에서 잠시 소란을 피운다는 이유로 여러분의 동생을 살해할 수 있습니까!’라고 열변을 토하실 땐 저도 모르게 샘솟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이분을 만나기 위해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아, 선생님! 그렇습니다. 우리는 진실로 자매형제인 것입니다. 선생님은 선생님의 어린 동생이 굶주려 있는데 그냥 못 본 채 하시지는 않겠지요? 제가 바로 선생님의 굶주린 동생이 아닙니까!”
파리 씨는 주저 없이 당차게 말하는 것이다. 알베르토 씨는 도시 되받아 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그렇소, 파리 씨. 당신의 말대로 우리는 서로 자매형제이자,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생명이오. 우리는 지구의 물이라는 공통의 초자아를 함께 공유하고 경험하였으니 말이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론의 영역이오. 세상에는 이론만으로 해결하기 힘든 현실의 문제들이 너무나 많소. 이 현실의 삶에서는 ‘관계 맺기’라는 것이 있소. 즉, 우리는 아직 이론상의 자매형제일 뿐, 실제로 자매형제로 관계를 맺지는 않았소. 우리가 서로 관계 맺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대화의 시간과 깊은 감정의 교류가 필요한 것이오. 생 떽쥐 뻬리라는 프랑스 작가가 쓴 어린 왕자라는 소설에 나오는 말처럼, 파리 씨 당신은 지금 나에게 이 지구의 무수한 파리 중의 하나에 불구하오. 우리가 이 한 잔의 에스프레소를 거리낌 없이 나눠먹는 사이가 되기 위해서는 서로를 길들일 시간이 필요치 않나 싶소.”
라고 말하는 알베르토 씨였다. 알베르토 씨는 이것 참 유감이오 라는 느낌의 표정을 연출했다. 많이 해본 솜씨였다. 알베르토 씨의 얼굴에는 점차 회심의 미소가 번졌다.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 더 마시는 알베르토 씨. 파리 씨는 애타는 눈빛으로 그 모습을 올려다보았다. 파리 씨는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되려 여유로운 표정을 이내 되찾는 것이었다. 파리 씨는 인지한 미소를 띠우며 알베르토 씨에게 너그러운 말씨로 얘기를 시작했다.
“오! 이런 형님! 저를 잊으셨단 말입니까? 저는 전생에 형님의 동생이었던 로베르토가 아닙니까. 지금 막 형님께서 그 우아한 손짓으로 에스프레소 잔을 쥐어들 때, 불현듯 모든 것이 떠오르고 말았습니다. 오오 저는 저 깊은 윤회의 바다로부터 형님을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날아왔건만 알아보지도 못하시고 어찌 이리 야박하십니까. 저는 형님을 단 번에 알아보았으나 기억이 불완전하여 차마 형님이라 먼저 부르짖지 못하고, 선생님이라 칭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이 완전해졌습니다! 오, 형님은 전생에도 아주 훌륭한 분이셨지요. 인자하고 현명하며 학식이 풍부한 분이셨습니다. 제 몸에 담긴 이 물의 기억은 200년 전 형님의 모습을, 특히 저를 아끼고 사랑하셨던 형님의 모습을 제게 생생히 전해주고 있습니다. 아, 이 기억을 꺼내어 형님 앞에 펼쳐 보이면 형님도 모든 것을 기억하실 텐데 말이죠. 형님! 우리에게 서로를 길들일 시간은 필요치 않습니다. 당치 않습니다. 우리는 전생에 이미 60년의 세월을 함께하지 않았던 가요? 형님께서 일찍 상처하셔서, 저와 함께 형님의 아이들을 길러내지 않았나요. 저를 정녕 기억하지 못하시나요? 형님께서는 이 물의 기억을 부인하시는 건가요? 윤회를 거짓이라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알베르토 씨는 다시 헛기침을 했다. 이번에는 좀 오래 계속되었다. 커피가루가 목에 걸리기라도 한 양. 알베르토 씨는 계속 머리를 굴려보았으나, 어떤 수를 쓰든 파리 씨를 물러가게 할 수는 없을 것만 같았다.
“허허 참. 현명하신 분이군요. 이리도 현명한 것을 보니 정말 나의 동생이 맞는 것 같소. 내 200년 만에 동생을 만났으니 먹다 남은 것을 줄 게 아니라 새 커피로 한 잔 대접할 테니 오늘 실컷 먹어보시오.”
“오, 고맙습니다 형님! 형님이야말로 진실한 이 시대의 지식인입니다.”
파리 씨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테이블 위를 날아다니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럼 잠시만 기다리시오. 주문하고 오겠소.”
알베르토 씨는 자뎅의 문을 열고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선다. 파리 씨는 요란한 비행을 중단하고 얌전히 테이블 위에 내려앉아 알베르토 씨를 기다린다. 알베르토 씨는 가게 안에서 종업원에게 어떤 주문을 하고 다시 밖으로 나온다. 알베르토 씨는 점잖게 의자에 앉아 상냥하게 말한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곧 종업원이 직접 커필 들고 나올 것이오. 우리 그동안 이 향긋한 바람과 햇살을 감상하고 있는 게 어떻겠소 동생”.
“좋지요.”
파리 씨의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주렁주렁 열린다.
“자, 그럼 눈을 감읍시다.”
알베르토 씨와 파리 씨는 눈을 감는다. 때마침 은은한 물의 향기를 머금은 듯한 선선한 바람이 불어 두 생명의 몸을 감싸며 흘러간다. 두 생명의 몸속의 호수에 잔잔한 파문이 인다. 심연의 기억들이 포르르 포르르 떠오른다. 두 생명의 수혼(水魂)이 지구의 바다를 헤엄쳐 우주의 바다로 향한다. 아, 그리고 내리붓는 따스한 햇살 햇살.
탁!!!
알베르토 씨는 살며시 눈을 뜬다. 종업원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죄송하다는 표시를 한다. 알베르토 씨는 신앙인처럼 인자한 표정으로 그럴 수도 있죠 라는 표정을 지어본다. 파리 씨는 온몸으로 피를 토하며 죽었다. 파리 씨의 시체는 휴지에 싸여 쓰레기통에 던져진다. 알베르토 씨는 조금 불결한 느낌이 들어 에스프레소를 다 마시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향한다. 먹다 남은 알베르토 씨의 에스프레소 주위로 이 지구상의 길들여지지 않은 무수한 파리들이 모여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