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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명진 Sep 22. 2015

꽃미남풍의 강아지

 꽁트 no. 28

꽃미남풍의 강아지였어.

남동풍은 아니고?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잔뜩 화가 나 있었다. 내가 던지는 말은 모조리 안타를 맞고 튕겨져 나왔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사이 나는 외야로 날아가버린 ‘꽃미남풍의 강아지’를 쓸쓸히 안고 돌아와야 했다. 그녀는 자신의 두 팔과 교차로 팔짱을 낀 채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었다. 내 도전이 무모한 측면도 분명 있었다. 이런 와중에 대체 꽃미남풍의 강아지 같은 게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물론 분위기 파악 못하는 장난질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말야... 잠깐만 열을 식힐 겸해서 좀 들어봐 주면 안 될까, 꽃미남풍의 강아지에 대해서 말이야.

뭐?!


그녀는 진심으로 황당해했다. 눈동자 속에는 얼핏 후회의 빛도 어렸다. 대체 뭐 이따위 남자를 사랑한다고 만나게 되었는가 싶은 후회 말이다. 나로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전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신경질적인 성격으로 따지면 그녀는 지리산이고 나는 히말라야쯤 됐으니까 말이다. 내 처지에서는 지리산 정도로 감히 엄살을 피워서는 안 되는 내재적 룰이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은 그 룰을 깰 수밖에 없었다. 꽃미남풍의 강아지에 대해서 증명하지 않고서는 내 삶의 명예가 송두리째 무너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런 근거도 없지만 때로 인생에서는 그렇게 근거 없는 것들이 순식간에 삶을 무너뜨리곤 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얘기하고서야 간신히 그녀는 꽃미남풍의 강아지에 대해 들을 마음을 내어줬다. 정말이지 감사했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음 그래 어디서부터 이야길 하는 게  좋을까. 뭐, 20년이나 지난 어린 시절의 이야기 같은 것 됐다 치고... 그래 오늘 아침의 일을 바로 얘기하는 편이 좋겠네. 오늘 아침이었어. 아침이라고 하면 6시 즈음인 거 알지? 내가 그 즈음 일어나잖아. 보통은 항상 그 시간에 깨어나면 흔들의자로 유령처럼 걸어가서 적당히 우울한 음악을 틀어놓고 닫힌 창문으로 새벽이 밝아 오는 것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데 말이야. 오늘은 어쩐지 창 문을 열어보고 싶어지는 거야. 이상한 일이지. 왜냐면 난 그 집에 3년 넘게 살았지만 새벽에 그 창문을 열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거든. 그저 가끔 대낮에 환기를 위해 여는 정도지. 근데 오늘은 열어버렸어. 활짝! 하고 말이야. 그리고 자연스럽게 흔들의자로 걸어가 앉았지. 천천히 흔들리면서 바람에 살랑 거리는 린넨 커튼 틈 사이로 보이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말야... 서서히  온몸이 얼어붙고 말았어. 아니, 진짜 얼어붙었다는 게 아니라, 놀라서 말이야. 창밖 저편에서 무언가가 나를 응시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거야. 나는 설마... 싶었지. 하지만 분명히 무언가가 나를 깊게 들여다보고 있었어. 마치 나의 전생까지 들여다보려고 하는 점술가처럼. 나는 유심히 창밖을 수색하다가 발견해내고 말았지. 맞은 편 집의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참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생물을 말이야. 우습겠지만 그 녀석은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어. 꽃미남풍의 강아지였어. 


우리의 시선이 드디어 맞부딪쳤어.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게 우리는 서로를 깊게 바라봤어. 어느 순간 내가 꽃미남풍의 강아지 속으로 들어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낄 정도로 말야. 우리는 완전히 이어져서 하나가 된 것 같았지. 우리 사이에 어떤 투명한 통로가 생겨버려서 그곳을 통해 서로의 영혼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어. 잘 들어봐. 드디어 내가 미쳤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듣기는 해줘 봐요. 문득 정신을 차렸는데 놀랍게도 나는 꽃미남풍의 강아지 속에 들어가 있었어. 계단을 내려와서 익숙한 골목길을 걷고 있었어. 왜 우리가 종종 산책하던 그 집 앞 골목길들 있지. 거길 그냥 태연하게 개걸음으로 걷고 있는 거야.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어떻게 돌아가는지 당연히 방법을 알 수 없지. 근데 웃긴 게 또 뭐냐면 그렇게 얼마간을 걷다 보니 아, 그냥 꽃미남풍의 강아지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하는 심정이 드는 거야. 어쨌든 꽃미남이니까 말이야. 나도 솔직함이라는 장점은 있는 사람이니까 하는 말이지만 누가 보더라도 사람인 나보다는 강아지 쪽의 나를 잘 생겼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거야. 아무튼 대단한 꽃미남 강아지였으니까. 약간 굵은 인상을 지닌 게 연예인으로 비유하자면 장동건 정도일까. 중후한 맛까지 있는 아무튼 대단한 꽃미남이었어. 


당연히 내가 단순히 미모를 지니게 됐다는 것 때문에 강아지여도 좋다고 생각한 건 아니야. 그 정도로 멍청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지? 그치만 좀 생각해봐. 대체 사람의 인생 어디가 강아지보다 낫다고 할 수 있는 거지? 아니, 널 설득하려는 건 아니야. 다시 강아지로 돌아가 제2의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고 피력하는 것도 아니고 말야. 그저 한번쯤 생각해보자는 거지. 인생과 견생에 대해서. 잠깐 잠깐. 일어나지 말고 앉아봐. 내가 헛소리를 지어내고 있다고 오해할 수도 있다는 거 알아. 하지만 내가 지금 이 중요한 일생일대의 순간에 헛소리나 지껄이는 인간이라면 네가 나와 오늘 담판을 낸다고 해도 나는 아무 할 말이 없을 거야. 그래, 차라리 강아지가 되어서 사는 게 훨씬 나은 부류의 인간일 거야. 아직 시킨 커피도 남았으니까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가지고 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줬으면 좋겠어. 내가 어떻게 꽃미남풍의 강아지에서 사람으로 돌아왔는지 궁금하지 않아? 그래, 그건 분명 궁금하지? 자, 이제 얘기를 계속해줄게. 


꽃미남풍의 강아지가 된 나는 슈퍼스타급 인기를 누렸어. 황홀할 정도였지. 그저 골목길을 유유히 걷고 있을 뿐인데 주말에 친구들과 나들이를 나온 미모의 여인들이 다들 나를 내려다보며 꺅꺅 비명을 지르고, 쓰다듬고 싶어서 안달이었지. 자자 앉아봐. 중요한 건 물론 그런 게 아니지. 이제부터니까. 정말 이제부터야. 여기서 중요한 사건이 시작된단 말이야. 이 사건을 얘기하자면 앞 부분의 전주를 할 수밖에 없었어. 이건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 같은 이야기는 아니니까 말이야. 전주가 있고 메인 멜로디가 있고 후주가 있는 그런 스탠다드한 구성의 이야기야. 


나는 납치를 당하고 말았어. 짧은 시간에 하도 많은 얼굴들을 봐서 나를 납치했던 여자아이의 얼굴이 잘 기억이 나지 않아. 에이였던 것도 같고, 비였던 것 같기도 해. 헷갈리니까 에이비라고 하자. 에이비는 마치 내가 자신의 강아지인 것처럼 낚아채서는 빨간색 세단에 태우고 도심 사이를 달려가기 시작했어. 뒷 좌석에 놓여진 내가 가까스로 강아지 수준에서나마 상황을 판단하고 백미러로 에이비의 얼굴을 파악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늦었어. 에이비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거든. 근데 어쩐지 나는 그런 상황이 익숙한 느낌이 드는 거야. 강아지 주제에 뭘 더 저항을 해봤자 아무 의미가 없겠다 싶어 그냥 상황을 즐기기로 해버렸지. 창밖으로 익숙한 풍경이 지났어. 곧 고속도로로 진입하는 듯했지. 강남에서 남부고속도로로 빠지는 그곳 있지. 거기를 지나더니 원주 즈음에서 강원도로 향하는 고속도로로 빠졌어. 에이비는 아무런 말도 내게 걸어오지 않았지. 그저 질주를 위한 질주를 계속했어. 석양이 질 무렵에야 바닷가에 도착했지. 에이비는 경포댄지 어딘지 모를 해안가에 차를 세우고 내린 뒤 뒷 좌석 쪽의 문을 열고 나를 안아서 모래톱 위에 내려놓았어. 바닷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지. 우와 그건 정말 대단한 경험이었어. 강아지의 청력이란 건 실로 엄청나더군.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제일 앞의 VIP석에 앉아서 듣는 것 같은 장엄한 사운드였어. 


에이비는 얼이 빠진 채 바다를 바라보며 꼬리나 살랑거리고 있는 나를 내버려둔 채 혼자서 파도 앞까지 걸어갔어. 나는 처음으로  멍멍하고 짖어봤어. 에이비를 부른 거야. 에이비는 돌아보지 않았어. 유괴범에 불과한 사람임에도 나는 어쩐지 시무룩해지고 말았어. 사람이 사람에게  무시당한다는 건 언제든 좋지 않은 건가 봐. 아, 나는 강아지였지만 말야. 그래도 속은 사람이니까. 에이비는 바다가  50미터쯤 뒤로 물러나고 붉게 물들었던 하늘이 깜깜한 우주가 될 때까지 한 자리에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있었어.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어. 어째서 에이비가 나를 납치했는지, 그녀가 지금 대체 어떤 의식을 행하고 있는 것인지. 연인과 이별한 건지, 부모님이 돌아가신 건지, 아니면 취업에 실패한 건지. 아무런 짐작을 할 자료가 없었어. 사실, 그것보다 나는 나에 대한 자료조차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지. 그저 어느 날 갑자기 꽃미남풍의 강아지가 되었을 뿐, 누가 나를 낳은 건지, 어째서 이른 새벽부터 남자 혼자 사는 집의 창문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던 건지 알 수가 없었지. 분명 꽃미남풍의 강아지 속에 들어왔으니 이 녀석의 내력 정도는 알아야 할 텐데 아무것도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았어. 그러다 그제서야 문득 떠올리고 말았지. 혹시 내가 이 녀석 속에 들어왔다면 이 녀석은 지금 내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닐까? 아, 나는 문제의 심각성을 비로소 알아차렸어. 이 녀석이 내 몸을 가지고 지금쯤 강아지 같은 행동을... 아니다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할게. 개 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몹시 걱정스러워지고 말았어.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 그제서야 나는 나로서 살아가야 맞다고 깨달은 거야. 나는 이방인을 만난 강아지처럼 겁에 질려서  멍멍하고 짖어댔어. 제발 에이비가 나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 주길 바라며 말이야. 에이비는 잔혹하리만치 돌아보지 않았어. 아무리 짖어도 돌아볼 낌새조차 풍기지 않았어. 아, 그건 정말 섬뜩한 공포였어. 온 세상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지. 아무도 나를 돌아보지 않는다. 나는 그저 꽃미남풍의 강아지일 뿐이다. 에이비는 그저 에이비의 방식과 스케줄에 따라 살아갈 뿐, 나의 사정 같은 건 고려되지 않는다. 순간 나라는 건 그저 네모난 포장 상자 속에 갇혀 있는 존재라는 걸 알았어. 상자의 벽면에 아무리 화려한 영상들이 펼쳐져도 골목길이 나오든, 바다가 나오든, 방 안의 풍경이 나오든 모두 상자의 안일 뿐이라는 걸. 이 상자의 밖으로 탈출하지 않는 한 근원적으로는 똑같다는 걸. 그러나 어쩌겠어. 이 상자의 진정한 출구가 어딨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 싯다르타는 해탈이라고 하고, 예수는 천국이라고 하겠지 뭐. 하지만 꽃미남풍의 강아지 주제에 해탈이니, 천국이니 하는 것도 우습고... 나는 그냥 포기하기로 해버렸지. 짖는 것도 멈추고, 에이비를 바라보는 것도 멈췄어. 파도 소리를 듣는 것도 멈추고, 내가 꽃미남풍의 강아지라고 생각하는 것도 그만둬버렸지. 


그랬더니 놀랍게도 나는 흔들의자 위로 돌아와 있었어. 창문은 열려 있었고, 린넨 커튼은 살랑거리고 있었지만 2층 계단참의 꽃미남풍의 강아지는 사라지고 없었어. 꿈을 꾼 건가 싶었는데 너무도 그 기억이 선명해서 꿈이라고 하기는 좀 그래. 아직도 그 바다의 파도 소리가 들릴 것 같아. 에이비의 실루엣이 가물거려서 조금 앞으로 걸어가 어깨에 손을 얹으면 에이비가 드디어 돌아볼 것만 같아... 자, 내 얘기는 이제 끝났어. 얘기를 끝내고 보니 분명히 알겠어. 꽃미남풍의 강아지를 목격한 나와 아직 목격하지 못한 너는 온전히 하나가 될 수는 없다는 걸. 나는 어쩌면 영영 에이비의 실루엣을 바라보고 있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걸. 내가 나인지 꽃미남풍의 강아지인지 하는 고민 속에서 살아가게 될 거라는 걸. 이해를 강요할 수 있는 일과 이해를 강요할 수 없는 일은 없어. 모든 일은 다 이해를 강요할 수 없는 일이야. 정말 미안해.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어. 단, 남동풍은 분명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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