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트 no. 44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 그때 ‘온실’이 떠올랐다.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지만 나는 아홉 살 즈음에 몹시 기이한 일을 겪었다. 그 일은 무덤에서 부활한 외증조 할머니와 자취집 옥상에서 크림파스타를 나눠 먹으며 글로벌 경제위기에 대해 논쟁하다 유튜버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것과 유사한 일이었다. 한 마디로 아무도 믿지 않을 일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내가 정말로 실제 겪었던 그 일에 대해서 입도 뻥끗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홉 살의 나는 고집스레 핑크색 학용품을 선택하고, 어른 손바닥 크기의 토끼 인형을 품 속이든, 가방 속이든 항상 지니고 다니던 당당한 남자아이였다. 그때도 여느 날처럼 학교 교문을 나서자마자 가방에서 토끼를 꺼내 품에 안고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낯선 포니테일 머리의 여자아이가 내게 말을 건 곳은 6차선 대로변의 건널목이었다. 여자아이는 토끼 인형이 섭취 가능한 당근이 있는 곳을 안다고 말했다. 나는 인형이 먹을 수 있는 당근은 없다는 건전한 상식쯤은 가지고 있는 아이였다. 그럼에도 여자아이에게는 그곳에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여자아이의 포니테일 머리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포니테일은 신호등이 빨간불에서 초록불로 바뀌고, 그 다음 다시 달빛으로 바뀔 텐데 그때 길을 건너면 된다고 했다. 과연 신호등은 초록불을 지나 달빛으로 바뀌었고, 그때 자동차도 사람도 불어오던 봄바람도 멈췄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함께 길을 건넜고, 이윽고 ‘온실’에 도착했었다.
포니테일은 온실을 과거이기도 하고 미래이기도 한 곳이라고 소개하며, 자신은 순수한 어린이들의 마음 속에 있는 ‘희망의 씨앗’을 영구보존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 중이라고 했다. 나는 ‘그래서 토끼 인형의 당근은 어디 있나’ 싶었지만, 포니테일의 아기 고양이 같은 목소리가 마음에 들어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포니테일은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토끼 인형을 품에서 놓아주면 온실에 심어둔 당근을 알아서 찾을 거라고 일러주었다. 반신반의하며 토끼를 온실 바닥에 내려놓자마자 토끼는 깡충깡충 온실 저편으로 뛰어가버렸다. 온실은 <기동전사 건담>에서 본 콜로니 시설만큼이나 광활한 곳이어서 토끼는 금세 보이지 않게 되었다. 걱정이 되었지만 곧 누그러졌다. 23도 즈음의 안온한 온실 온도 덕이었다.
우리는 온실 한 켠의 동그란 고무나무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았는데, 포니테일은 다짜고짜 내게 꿈이 뭐냐고 물었다. 나는 다짜고짜 ‘예능인’이라고 말했다. 포니테일은 이유를 물었다. 예능인은 활동기간이 길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포니테일은 납득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공무원도 괜찮지 않느냐고 했다. 나쁘지 않다고 답했다. 포니테일은 수첩에 ‘공무원도 나쁘지 않음’이라고 기록했다. 그게 뭐냐고 묻자, 포니테일은 일종의 처방전 같은 거라며 그걸 불에 태워 재로 만든 다음, 특수한 액체에 녹이면 거기서 ‘희망의 씨앗’이 만들어진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모은 씨앗들을 어디에 쓰는 거냐고 재차 묻자, 언젠가 우주가 쪼그라들면 자기가 그걸 뿌려서 다시 우주를 넓히는 일을 한다고 했다. 나는 어째서 우주를 다시 넓혀야 하는지 물었다. 포니테일은 거기까지는 자신도 잘 모르고, 그냥 정해진 일이라서 한다고 답했다. 나는 직장인 같은 거구나하고 그냥 납득해버렸다. 간단한 인터뷰가 끝난 뒤, 우리는 함께 바나나맛 우유를 마시며 토끼를 기다렸다. ‘예능인을 희망하나 공무원도 나쁘지 않음’이라는 내 희망의 씨앗이 전 우주에 조용히 퍼져나가는 장면을 잠깐 상상했다. 그다지 장엄하지는 않았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갑자기 나는 병원 침대에서 눈을 떴는데, 아무리 찾아도 토끼 인형이 보이지 않았다. 가족들은 나를 미치게 만들 작정으로 내가 애초에 토끼 인형을 가지고 다닌 일이 없다고 주장했다. 나는 가족들이 다 미쳐버렸다고 여겼지만, 퇴원을 위해 가족이 아닌 내가 미쳤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렇게 영영 토끼 인형을 ‘온실’에 잃어버린 채 나는 미치광이로서 수십 년을 살아온 것이다. 예능인도 공무원도 되지 못했다. 꿈도 희망도 없는 보통의 어른이 되어 월요일마다 로또를 사고 있을 뿐이다. 어쩐지 포니테일 머리에는 여전히 매력을 느꼈다. 가끔 포니테일 머리의 여자아이가 나만큼 자랐다면 어떤 모습일지 상상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대체로 그런 느낌의 여성들과 교제해왔다.
그리고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250번째 로또에 실패한 어젯밤, 티비 채널을 돌리다가 우리의 우주 자체가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며 윤회하고 있다는 물리학 가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원시입자들로 들끓고 있는 우주 속에서 당근을 찾아 떠도는 나의 토끼 인형을 생각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온실’에 도착했다. 동그란 고무나무 테이블에는 과연 멋지게 성장한 포니테일 머리의 여자아이와 나의 토끼 인형이 마주 보고 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다. 다행히 글로벌 경제위기가 아니라 새로 데뷔한 걸그룹 노래에 대한 토론 같았다. 나는 비어 있는 의자에 자연스레 앉아 그 토론에 참여했다. 7월 중순의 바닷물 속으로 스윽 몸을 담그는 것처럼 수십 년 전의 순간과 지금의 순간이 이어졌다. 23도의 공기 속으로 23도의 목소리들이 부드럽게 섞였고, 투명한 달빛이 온실의 유리벽을 건너와 첼로와 피아노, 콘트라베이스의 삼중주처럼 우리들을 감쌌다.
포니테일이 문득 내게 물었다. 그런데 대체 어딜 갔다가 이제 오느냐고. 나는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내가 어디에 있었다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름다운 아가씨가 된 포니테일과 달리, 토끼는 내가 아홉 살이던 그때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제서야 나는 내 인생에서 무엇이 잘못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아작아작 당근을 씹고 있는 토끼를 냅다 끌어안았다.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을게. 포니테일이 나와 토끼를 향해 사랑스럽게 웃었다. 우리 셋은 한참 동안이나, 새벽의 혜성을 다섯 번이나 볼 동안이나, 긴 대화를 나눴다. 대체로 각자가 살아온 시시한 삶에 대해서였다. 더 이상 나눌 이야기가 없어졌을 때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그리하여 나는 오늘 이른 새벽 어스름결에 토끼와 함께 솔직히 어디인지 모르겠는 이곳으로 돌아왔다. 물론 지금까지 한 얘기는 모두 가벼운 농담이다. 당신이 이 이야기를 믿을 수 없다면. 그런 것으로 해두자. 이제 상관없다.
2023. 3. 22. 멀고느린구름.
* 이 소설은 황지영 화가님의 아래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쓰였습니다. 원페이지스토리(https://1pagestory.com/27821/)를 통해 특별히 이뤄진 콜라보 작업물입니다. 원페이지스토리는 1페이지 내외의 소설을 발표할 수 있는 온라인 문학 플랫폼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