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D저널'에 기고한 글입니다
어제는 있었고 오늘은 없다. 예전에는 보였는데 지금은 사라졌다. 나는 지금 수수께끼를 내는 것이 아니다. 봉준호 영화에 불어온 변화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돌아보건대 <미키17>은 독특한 위치에 있다. 그의 영화를 관통하던 어떤 강렬한 특성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 당황스러운 지각 변동의 진원지를 찾아 나서려 한다. 변화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아래부터 <미키17>과 봉준호의 전작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다.
봉준호 영화는 크게 두 단계로 구성된다. 그것은 '질주'과 '반전'이다. <살인의 추억>(2003)을 예로 들어보자. 연쇄 살인이 일어나며 형사 두만(송강호)과 태윤(김상경)은 본격 수사에 돌입한다. 범인은 이놈인가? 아니면 저놈인가? 좌충우돌 블랙 코미디로 치닫는 이 추격 과정에서 피어나는 쾌감은 상당하다. 봉준호는 관객을 유인해 열차에 태운 뒤에 신나게 내달리는 재주 좋은 기관사다.
그리고 이 여정의 종착지에는 '반전'이 도사리고 있다. 확신했던 자는 범인이 아니고(<살인의 추억>), 천국 같던 기차와 저택의 지하에는 상상 못 한 것이 웅크리고 있다(<설국열차>, <기생충>). 뜨거운 달음박질이 무(無)로 돌아가는 허탈한 순간. 그제야 관객은 배후에 도사리고 있던 전망에 눈을 뜬다. 거기에는 비극을 막지도 못한 채 애먼 시민을 희생시킨 1980년도의 삭막한 풍경이나(<살인의 사건>), 사회로부터 탈락하여 기생충처럼 살아가는 서글픈 인간의 초상이 있다(<기생충>). 봉준호 영화의 반전은 언제나 사회의 폭력을 정조준한다.
하지만 <미키17>에 이르러, 이런 특징은 상당히 약화된다. 먼저 이 영화에는 질주라고 할 만한 과정이 잘 보이지 않는다. 예고편에도 나왔듯, '미키18(로버트 패틴슨)'이 '미키 17(로버트 패틴슨)'을 죽이려 드는 장면이 등장한다. (굳이 치자면) 질주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 씬은 예상보다 짧고 싱겁게 끝이 난다. 또 이 영화에는 반전이라 할 만한 부분도 적다. 괴생명체 '크리퍼'의 활약이 예상을 뛰어 넘긴 하지만, 사회의 서늘한 어둠을 비추던 이전에 비하면 질적으로 다르다.
사실 <미키17>에는 봉준호가 슬쩍 숨겨둔 또 하나의 반전이 따로 있다. 그것은 미키 17이 꾸는 꿈이다. 그의 꿈에 지독했던 일파 마샬(토니 콜렛)이 다시 나타난다. 그토록 집착했던 소스와 함께. 그녀는 미키17에게 자기가 만든 소스를 맛보라고 한다. 옆에서는 케네스 마샬(마크 러팔로)의 몸이 프린팅되고 있다.
이 기묘한 시퀀스는 불온한 상상을 자극한다. 실은 일파야말로 이 우주선의 주인이며, 케네스는 그녀가 찍어내는 익스펜더블에 불과하다는 상상. 그녀가 권하는 (누가 보아도 핏물처럼 보이는) 시뻘건 소스는 무엇으로 만들어졌을까. 새삼 케네스의 덜컹거리는 몸뚱아리가 시선에 들어온다.
이 잔혹한 장면은 전작들에 등장한 '반전'에 필적한다. 단언컨대 이것이야말로 봉준호의 취향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상상을 밀고 나가지 않으며, 단지 기분 나쁜 꿈으로 남겨둔다. 낮잠에서 깬 미키17은 희망찬 미래로 나아간다. 그런데, 그 꿈이 현실이 아니라고 보장할 수 있을까? 혹시 지금 이 순간이 꿈은 아닌가? 약간의 불안을 스크린에 새긴 채로 <미키17>은 밝게 마무리된다.
이제 차이가 느껴지는가? 봉준호의 전작들이 정신 나간 속도로 미끄러지다가 낯선 풍경에 우뚝 멈춰 선다면, <미키17>은 기분 좋을 정도로 벅차게 달리다가 기어이 도약에 성공한다. 이건 영화의 근본적인 변화다. 그런 면에서 <미키17>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봉준호의 색이 가장 약한 작품이다.
그렇다면 봉준호는 왜 달라졌을까. 무슨 바람이 불었길래? 먼저 원작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는 <미키7>이라는 이름의 원작 소설에 기반했다. SF 세계관을 촘촘하게 설정한 원작의 자장에서 자유롭기 어렵다는 뜻이다. 봉준호가 처음부터 각본을 쓴 작품과는 차이가 있다.
두 번째로, 세계가 바뀌었다. 그가 바라보는 세상이 변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영화화하는 방식에도 변화가 생긴 것이다. 봉준호는 늘 세계의 폭력을 주시한다. 그런데 예전 작품에서 폭력은 '사회 구조적인 문제'에 속했다. 쓰러질 때까지 술을 먹이는 가학적인 직장(<플란다스의 개>), 아무나 잡아다 발길질하는 형사(<살인의 추억>), 독극물을 유기하고 거짓을 조작하는 정부 기관까지(<괴물>). 이런 폭력은 흉하게 돌출되어 있기 때문에 금방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최근작에 이르러 폭력은 '취향의 문제'로 변모하였다. 다른 이의 고통은 아랑곳 않고 자신의 고매한 취향을 즐기는 얄미운 상류 계급이 등장한다. <설국열차>(2013)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사지에 내몰린 꼬리 칸은 외면한 채 사치를 즐기는 앞쪽 칸. <옥자>(2017)는 생명이 미식으로 다뤄지는 세태를 풍자한다. <기생충>(2019)에서 누군가의 처절한 삶의 흔적은 박 사장(이선균)에게 거슬리는 냄새일 뿐이다. 이런 류의 폭력은 겉에서 보았을 때 매끈하고 세련되며 우아해서, 알아보는 일조차 쉽지가 않다.
<미키17>은 이런 경향을 이어받는다. 일파의 '소스'로 대표되는 고매한 취향. 그것은 무고한 생명을 해치면서 완성된다. 또 미키에게 돈을 빌려준 사채업자도 취미로 살인을 하는데, 그는 이것을 미학의 단계로 끌어 올린다. 그들은 자기만족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 저지른다. 마치 자신과 타인의 가치가 전혀 다르다는 듯 말이다. 이토록 극단적인 선민의식, 거기 동조하고 침묵하는 사회. 이것이 최근 봉준호가 주목하는 새로운 폭력이다.
그래서 영화의 톤과 분위기도 달라졌다. 우악스럽고 극적이었던 이전과 달리, 조용하고 섬세해졌다. 많은 이들이 <옥자>부터 <기생충>, <미키17>까지 최근 들어 코믹하고 발랄해진 톤을 언급한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그가 포착한 세상의 폭력이 이 같은 양상으로 변하고 있기 때문에 드러난 변화다.
물론 내가 위에서 꼽은 이유도 완벽하진 않다. <미키17>의 독특함은 몇 가지 요인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는 감독과 세계가 나누는 대화다. 감독이 마주한 풍경이 바뀔 때 영화도 자연스레 변모한다. 나는 그것을 되짚었을 따름이다. 그의 변화가 마음에 드는지 안 드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이제야 밝히지만 나는 실은 봉준호의 초기작을 선호한다. 하지만 그가 제자리에 고인 채 자기가 잘하는 것만을 반복한다면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미키17>은 내게 반가운 배반으로 다가온다.
원문 https://www.pd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806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