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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Mar 17. 2022

그 영화 속 주저함의 정체는, <나이트메어 앨리>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내게 <나이트메어 앨리>는 기예르모 델 토로의 최고작이 아니다. 물론 관객은 저마다 다른 판단을 내릴 것이다. 각자의 기준에 따라. 그에 대한 논의는 내게 그다지 큰 관심거리가 못 된다. 오히려 영화를 본 순간부터 나의 관심을 강하게 잡아끄는 요소는 따로 있는데, 그것은 영화 전반에서 지속적으로 감지되는 어떤 ‘주저함’이다. 그래, 주저함. 몇번을 다시 보아도 나의 생각은 같다. 영화가 예정된 파멸을 향해 달려갈 때, 거기에는 나아가다 멈춰서고 나아가는 순간조차 발소리를 줄이는 조심스러운 움직임이 포착된다. 단순히 전개 속도가 느리다거나 톤이 건조하다는 뜻이 아니다. 파멸에 대한 저항. 추락을 향한 머뭇거림. <나이트메어 앨리>에 대한 나의 평가는 상당 부분 이러한 주저함과 관련이 있다. 이 글이 영화의 독특한 움직임에 다가설 수 있기를 바란다.


괴인을 탄생시키는 비극적인 과정


<나이트메어 앨리>는 기예르모 델 토로의 작품 중 흔치 않게 누아르 장르이며 판타지 요소가 상당히 억제되어 있다. 그러나 이외에도 중요한 차이점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영화에 등장하는 ‘괴인’의 성격이다. 삶의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이들이 수행하는 ‘괴인’이라는 존재는 기예르모 델 토로의 전작들에 등장한 ‘크리처’와 겹친다. 독특한 외양에 이질적이고, 두렵지만 눈을 떼기 어려우며, 그것을 향한 이끌림과 탐색이 영화의 큰 줄기를 이룬다.


다만 <나이트메어 앨리> 괴인에게는 불행의 냄새가 짙게 배어난다는 점이 좀 다르다. 전작의 크리처들이 아득한 세계에서 찾아온 신비하고 매력적인 존재였던 것과 달리 괴인은 욕망에 잠식당한 사람의 ‘불쌍한 영혼’(poor soul)이 파멸한 결과 탄생한다. 그것은 평범한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기에 더 끔찍하다. 영화에서 스탠턴(브래들리 쿠퍼)은 스스로 금기시하던 술에 손을 대고, 사람을 죽이는 행동 끝에 괴인으로 전락한다. 거기에는 율법을 어긴 자에 대한 징계의 성격도 엿보인다. 괴인을 바라보는 기예르모 델 토로의 시선에는 여전히 호기심과 매혹이 묻어나지만, 파멸과 추락의 결과 생겨나는 비극적인 존재라는 점에서 전작의 크리처들과 결을 달리한다. 이 점을 짚고 넘어가고 싶다.


이런 차이점은 영화의 각본이 원작 소설 에<나이트메어 앨리> 기대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욕망에 함락되고, 유혹에 넘어가며, 평범한 인간이 서커스의 괴인으로 전락하는 비극적인 과정을 ‘추락의 서사’라 하겠다.


영화를 보며 유독 이상하다고 느낀 장면이 하나 있다. 무언가 독특해서 눈에 덜컥 걸려버린 장면. 어두운 밤, 스탠턴은 괴인이 되어버린 낯선 남자가 내는 신음 소리를 듣고 그에게 다가가 담배를 건넨다. 평소 움츠려 있던 남자도 이 순간만큼은 가까이 다가와 담배를 입에 문다. 이것은 영화를 통틀어 괴인이 다른 누군가와 진정으로 교감하는 유일한 순간이다. 미지의 존재를 향한 탐색과 접촉은 기예르모 델 토로 영화의 단골 소재이지만 괴인은 몰락한 존재라는 점에서 그것과의 접촉은 더 크고 묵직한 파동을 전한다. 그런데 바로 뒤에 예상치 못한 장면들이 이어진다. 스탠턴은 몰리(루니 마라)에게 다가가 조잘거리며 직접 고안한 의자를 선보이고, 빙글빙글 도는 회전목마에서 그녀에게 구애한다. 스탠턴이 남자와 조우한 후, 어쩐지 영화의 기운은 고조되고 달달한 순간들이 지속된다. 언제까지? 그가 남자를 거리에 버리는 순간까지.


‘추락한 존재’라는 괴인의 성격을 고려할 때 그와의 접촉이 마치 스파크를 일으키듯 영화에 화사한 기운을 불러오는 것도 당혹스럽지만, 그것이 정확히 괴인의 퇴장과 동시에 사라지는 것은 심상치가 않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는 이런 진행을 기예르모 델 토로의 전작에서 본 적이 있다.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에서 주인공 엘라이자가 처음 어인과 관계를 맺을 때, 낭만적인 음악이 흐르며 버스 창가의 물방울조차 춤을 춘다. 둘이 욕실에 물을 채워 사랑을 나누는 순간에는 사방으로 물이 튀는 소동이 일어나기도 한다. 영화의 기운을 기분 좋게 끌어올린다는 점에서, 스탠턴과 괴인의 조우는 기예르모 델 토로의 주인공들이 소중한 크리처와 마주친 순간과 유사하게 느껴진다. 이것은 괴인을 바라보는 기예르모 델 토로의 시선과도 일치한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각본의 설정과 서사를 생각할 때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데, 괴인은 욕망에 잠식된 인간의 표상이라 접촉하기 두렵고 꺼려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감전을 조심하라”는 몰리의 말처럼.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다. 괴인을 대하는 영화의 태도(매혹적인 크리처)와 서사(추락의 결과) 사이에는 균열이 존재한다고.


활력이 과하거나 부족하거나


앞서 예상과 다르게 활기가 넘치는 장면에 대해 설명했는데, 반대로 기대와 다르게 활력이 너무 부족해서 당혹스러운 장면들도 있다. 이 영화에서 추락의 서사를 묘사하는 장면들은 대체로 긴장감이 부족하다. 또 스탠턴이 욕망에 함락되어 잘못된 선택을 내리는 장면들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예를 들어 그가 릴리스 박사(케이트 블란쳇)와 키스한 후 술을 입에 댈 때, 에즈라(리처드 젱킨스)의 사건을 맡겠다며 그의 소굴에 제 발로 들어갈 때, 거기에는 중대한 결단에 어울리는 에너지가 느껴지지 않으며 맹숭맹숭하다. 그러다보니 스탠턴은 정해진 수순을, 영화는 짜여진 각본을 건조하게 따라간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다. 그것은 절제미라는 착시 효과를 일으킬지 모르겠지만 활력의 결핍이다.


요약하자면 <나이트메어 앨리>는 괴인을 마주할 때에는 지나치게 활기가 넘치고, 추락의 서사를 그릴 때에는 지나치게 활기가 부족하다. 이런 비대칭은 영화를 절뚝거리게 만든다. 나는 이것이 기예르모 델 토로의 부주의나 연출력 부족의 탓이라고 보지 않는다. 물론 그가 서사에 대한 묘사를 절제하는 대신, 비극적 운명과 마술적인 판타지를 강조해, 우아하고 매끈한 누아르 작품을 추구한 결과라고 볼 여지도 있다. 그러나 절제와 무기력은 다르고, <나이트메어 앨리>에서 추락의 서사가 등장하는 순간들은 후자에 속한다. 이런 무기력함은 크리처와의 조우를 향해 신나게 내달리던 기예르모 델 토로의 전작들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래서 나는 오독의 위험을 감수하고 이런 가설을 제기해보고 싶다. 그는 사실 ‘괴인’이, 그가 사랑해 마지않는 크리처 중 하나가, 추락의 결과 탄생한 흉한 존재라는 서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괴인과 조우할 때의 활력. 추락의 서사를 따라갈 때의 무기력. 이 묘한 태도의 원인은 사실 감독의 가슴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


이번에 더욱 뚜렷하게 느꼈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영화는 역시나 괴생물체와 만나고 탐색하고 동경과 애정 어린 시선으로 우정을 나눌 때에 진정으로 생동한다는 것을. <나이트메어 앨리>를 두고 나쁜 영화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나는 서사와 정서가 일치하지 않아 때때로 멈칫거리며 주저하는 영화를 지지할 자신이 없다. 누군가는 유치하다 말할지 몰라도, 생동하는 기예르모 델 토로의 작품들을 나는 사랑해왔다. 다시 그런 작품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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