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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Mar 06. 2022

시선의 영화, <더 배트맨>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 게재한 글 中


<더 배트맨> 포스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2022년 우리를 다시 찾아온 박쥐 인간, <더 배트맨>을 둘러싸고 이 영화의 영상미나 고전적인 아름다움, 어둡고 묵직한 누아르의 색채에 대해 굳이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미 많은 곳에서 충분히 언급이 되었으므로. 다만 유독 두드러져서 충분히 언급되어야 함에도 잘 되지 않고 있는 부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중요해서 이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하는 부분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이 영화를 지배하는 주요한 코드는 바로 '시선'이다. 사실 <더 배트맨>은 "시선의 영화"라고 하여도 과장이 아닐 정도로 '본다는 것'에 대한 고민을 풍부하게 담은 작품이다. 

특히 영화의 전반부에서 배트맨(로버트 패틴슨)은 집요하게 '보는 것'에 집착하는데, 이것은 그가 아직 그의 아버지를 둘러싼 진실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설정과 관련이 깊다. 그는 망원경, 렌즈처럼 생긴 카메라 등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최대한 시선을 확보하려고 하지만, 매번 흐릿하거나 절반뿐인 풍경에 답답해한다. 그러나 '보는 것'에 대한 그의 집착은 후반부에 이르러 완전히 사라진다. 언제를 기점으로? 그가 아버지의 비밀을 알게 된 순간을 기점으로.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더 배트맨> 스틸컷

영화는 특이한 숏으로 시작된다.

옆집을 건너보는 망원경의 시선. 우리는 꼼짝없이 누군가의 시선을 따라, 세 가족이 장난을 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이 장면에서 그 시선의 대상보다는, 시선의 존재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 시선이 '무엇'을 보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망원경을 통해 상대를 건너보고 있다'는 사실 자체, 즉 그 시선이 거기 있다는 사실 자체가 더욱 중요한 것이다.


그 다음으로 눈에 띄는 것은 '렌즈처럼 눈에 끼우는 카메라(편의상 '렌즈 카메라'라고 표현)'를 쓰고 여기저기를 관찰하는 배트맨(로버트 패틴슨)의 모습이다. 그는 집에 돌아와서 렌즈 카메라에 녹화된 영상을 다시 돌려보고, 심지어 자신이 가지 못하는 곳에는 캣우먼(조 크라비츠)에게 자신의 렌즈 카메라를 쓰게 한 다음 세상을 관찰한다. 캣우먼, 카메라, 녹화된 영상의 3단계를 거쳐 이뤄지는 '시선'에 대한 그의 욕망은 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보는 시선은 자주 불완전하다. 인상깊은 장면이 있다. 캣우먼이 그가 준 렌즈 카메라를 끼고 클럽 안을 돌아다니는 시퀀스를 생각해보자. 이때 카메라에 잡힌 풍경은 그다지 선명하지 않다. 노이즈가 자주 시야를 방해하고, 심지어 이물질 같은 것이 계속 묻어있기도 하다. 이것은 단순히 렌즈 카메라의 성능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브루스 웨인의 시선에 여전히 제약이 많다는 것을 함의하는 것이다. 곧, 그는 아직 무언가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뜻인데, 그것은 당연히도 '그의 가족을 둘러싼 비밀'이다.



<더 배트맨>이 얼마나 시선에 관한 고민을 깊이 담은 영화인지를 이해하고 본다면, 관객이 이 영화에서 즐길 수 있는 부분들은 훨씬 풍성해진다. 배트맨은 계속 보려하지만, 시선은 계속 불완전하고, 세상은 그를 향해 절반만 열려있다.


가장 인상깊은 장면이 있다. 바로 배트맨과 펭귄(콜린 파렐) 사이의 카체이싱 시퀀스이다. 펭귄이 차를 타고 도망가고, 배트맨이 그를 추격하는 그 장면.


이 장면은 아직 배트맨이 자신의 가족을 둘러싼 비밀을 알지 못하는 때 등장하기 때문에, 여전히 시야가 제한된 시점이라고 볼 수 있다. 이때 '제한된 시선'에 대한 영화의 연출은 극에 달한다. 분명 굉장히 공들여 찍은 것이 분명한 장면임에도 이상하게 카메라의 시선은 답답할 정도로 제한되어 있다. 질주하는 멋진 차들을 부감(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앵글)으로 시원하게 찍을 법도 하건만 카메라는 그런 앵글을 의도적으로 회피한다. 대신 펭귄의 차 앞유리에 절반쯤 걸쳐진 채로 뒤에서 추격하는 배트맨을 겨우 겨우 쳐다보거나, 작은 백미러를 통해 뒤쪽의 시야를 확보하는 식이다. 카메라는 늘 시야의 제약을 감수한 채로 이들을 쫓아다닌다. 그러나 '시선의 제약', 즉 '진실에 대한 무지함'을 함의한 채로 진행되는 이 장면은 여전히 긴박하며 에너지 넘친다. 특히 백미러를 통해 배트맨 차의 추격을 확인하는 숏이나, 거꾸로 뒤집힌 펭귄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숏은 기가 막힌다. <더 배트맨>의 감독인 맷 리브스의 연출력은 이 장면만으로 충분히 호평받아야 한다.



결국 펭귄을 붙잡은 배트맨은 그를 묶어두고 취조를 한다. 어떤 잔인한 사진을 보여주자 펭귄이 눈을 돌리는데, 이때 제임스 고든(제프리 라이트)이 큰 소리로 "제대로 보라"고 소리친다. 이것은 "더 이상의 거짓말은 안 된다"는 리들러(폴 다노)의 메세지와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인데, 배트맨이 '진실에 눈 떠야 한다'는 것을 영화가 암시하는 부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보는 것'에 대한 영화의 관심은 어느 순간에 이르러 사라지는데, 브루스 웨인이 아버지에 대한 비밀을 깨닫는 순간부터이다. 그 이후에는 그가 그렇게나 애용하던 렌즈 카메라도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시선을 대신하는 부분들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바로 '소리'이다. 영화의 중반부터 보는 것 대신 듣는 것이 중요해진다. 배트맨은 리들러가 남긴 메세지를 '보는' 것에 그치다가, 어느 순간부터 '목소리'를 통해 그와 의사소통한다. 또한 팔코네(존 터투로)의 목소리가 녹음된 파일이 진실을 밝히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모두 '소리'가 진실을 발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장면들이다.



영화의 후반부.

이제 진실을 둘러싼 숨바꼭질은 끝났다. 배트맨과 리들러의 정면대결이 남은 순간. 이 때에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광장'이라는 장소의 공간감이다. 하나의 광장에서 정치인이 연설을 하고, 범죄자들은 파멸을 노리고, 히어로는 구출을 감행한다. 모든 이들의 욕망이 버글거리며 몸을 부딪히는 공간.


앞서 좁은 클럽, 어두운 고아원, 밀집된 경찰서 등 폐쇄적인 공간을 오가던 주인공들은 이제 탁 트이고 개방된 광장에서 마지막 전투를 준비한다. 그런 점에서 영화의 전반부와 후반부의 공간감은 대비를 이룬다. 이것은 진실을 모른 채 집요하게 시선을 확보하던 시절의 배트맨과, 진실을 깨달은 후 사회를 수호하기 위해 대전을 수행하는 배트맨이 처한 상황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결국 마지막 순간, 배트맨은 복수를 포기하고 구원을 선택한다. 이때 그의 구원이 붉은 횃불을 통해 시민들의 길잡이가 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어두운 곳에서 진실을 보려 발버둥치던 그는 이제 스스로의 결단을 통해 (누구나 볼 수 있는) 밝은 횃불로 변모한다. 망원경으로 옆집을 훔쳐보던 것에서 나아가, 타인의 시선을 이끌기까지. '시선'을 둘러싼 배트맨의 입장 변화를 생각한다면 이 장면은 감동스럽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다시 등장한 리들러. 전에 폭탄이 터지는 밖을 쳐다보며 환호하던 그는 이제 어둡고 좁은 감옥에 움츠러들고 있다. 이때 넓은 광장에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배트맨과 그의 차이가 분명히 드러난다. 하지만 그는 다시 친구를 만났고,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우리는 배트맨을 아직 떠나보낼 수 없다.



<더 배트맨>은 무엇보다 영상미가 뛰어난 작품이지만, '진실의 자각'을 '시선과 시야의 확보'로 풀어낸 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물론 역대 영화 중에 '진실'을 '보는 것'으로 치환해서 표현한 사례는 너무 많아서 미처 다 꼬집기도 힘들 정도다. 그러나 익숙한 코드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해 낸 <더 배트맨>의 연출은 충분히 즐길만하고, 그런 집념을 제대로 터뜨린 카 체이싱 장면은 박수를 보내고 싶다. 놀랍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수 있지만, 묵직하고 우아하며 장중한 시리즈의 탄생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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