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이야기가 되다.
“우리 아메리카노 네 잔.”
“여기 핸드드립만 하는데 괜찮으세요?”
“커피 파는데 아니요?”
한 달 전 등산복 차림을 한 할아버지 네 분이 카페로 들어왔다. ‘아메리카노 커피’를 찾는 손님들에게 핸드드립 커피만 판매한다고 설명하면 대부분 ‘잘못 왔네!’ 하는 표정을 짓고 나가는데 할아버지들은 커피가 다 같은 커피 아니냐며 바 테이블에 앉았다.
“조카! 우리 왔다.”
할아버지 한 분이 내게 성이 뭐고, 본이 어디고, 파가 뭔지를 묻는 과정에서 손님들 중 두 분이 나와 혈맹(?) 관계임이 밝혀졌고 그 날 이후로 할아버지들은 어김없이 ‘조카! 우리 왔다.’라는 인사를 건네면서 자주 카페를 방문한다. 복잡한 메뉴판도 없고 두서너 잔 알아서 커피가 척척 나오니까 이용하기 편하신 모양이다. 게다가 지역마다 다른 커피 맛으로 세계 여행을 할 수 있어서 좋아하신다.
칠순이 넘은 할아버지들의 목소리가 얼마나 큰 지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면 10평 남짓한 카페가 들썩들썩거린다. 조용히 커피를 즐기러 온 단골손님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드는 것도 잠시, 신기하게도 할아버지들은 처음 보는 그들과 거침없이 웃고 이야기를 나눈다.
“조카야! 우리 급식소에서 얼마나 욕을 많이 얻어먹는지 아나?”
“왜요?”
“어르신 한 분이 우리한테 천 원짜리 점심 먹고 5천 원짜리 커피 마신다고 난리다.”
커피를 5천 원이나 주고 마신다는 이야기를 어떤 어르신 한 분이 듣고는 심각하게 한 마디 하신 모양이다. 할아버지들이 경제력이 없어서 천 원에 점심식사를 제공하는 급식소를 이용하는 것은 아니다. 급식소는 비슷한 연령대의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하고 정보를 나누는 장소로 20, 30대가 다니는 클럽과 다르지 않다.
비싼 커피를 마시는 것에 대해 누구나 비판할 수 있는 것처럼 누구든 비용을 지불하고 커피를 마실 수 있다. 커피 한 잔 마시는 행위가 행복하고 즐겁게 느껴지는 사람은 그래도 된다. 빵이든 술이든 명품이든 세상 그 무엇이든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오히려 욕망을 무한정 억제하며 자신을 위해 살지 못하는 삶이 문제이지 않을까?
“맡아보시라니깐요. 얼마나 좋은데. 좋으면 좋다고 표현도 좀 하고 그러세요.”
“아, 그 자슥 참.”
분쇄된 원두 향기를 맡아보라고 건네면 ‘이런 거 안 한다!’며 외면하는 경상도 상남자 할아버지가 있는데 나는 일부러 분쇄된 커피가 담긴 용기를 할아버지 코 밑으로 밀어 넣는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웃으며 못내 향기를 맡는 척한다.
“좋으네.”
“거 봐요. 좋잖아요. 커피 향기가 얼마나 좋은데. 어르신! 저한테 커피 배우실래요?”
“야! 내가 이 나이에 뭘 배우냐?”
“아직 이렇게 기운이 넘치고 창창하신데 배우셔야죠. 앞으로 평생 커피를 드실 거면.”
“창창하기는 무슨. 아침에 일어날 때 삭신이 쑤시는데.”
“그러지 말고 주전자 한번 잡아 보세요. 배워서 집에 할머니도 내려드리고 하면 좋잖아요.”
교육비가 따로 없다고 해도 주전자를 손에 쥐어 주려고 하면 할아버지들은 질색을 한다. 언젠가부터 할아버지들이 앞치마를 두른 채 주방에서 커피를 내리는 모습을 상상한다. 홀에는 바둑을 두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그림을 그리는 할아버지들이 가득하다.
건강한 노령 인구가 점점 많아지는데 갈 곳이 없고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부족하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오늘 아침 일본에서는 인생을 3 모작으로 설계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수명이 길어지고 있기 때문에 일생을 20~40세, 40~60세, 60~75세로 나누어 새로운 일을 배우고 직장을 갖는 구조를 만든다는 것이다.
정치의식이 다르다는 이유로 세대 간에 반목과 갈등이 가득한 현실이다. 그런 이유로 우리 사회 노년층을 비난만 하고 있지 않은지 한 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젊은 세대들도 언젠가 할아버지라는 말을 듣는 날이 올 것이다. 노년층의 삶을 외면할 게 아니라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할 시기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