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르기 이야기]
라면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어느 휴일, 점심즈음 느지막이 일어나 출출해진 그는 냄비에 물을 올립니다.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길게만 느껴집니다. 50분 같던 5분이 지나고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물이 끓기 시작했을 때 그는 이미 라면 봉지를 뜯고, 수프봉지도 뜯고, 라면을 반으로 가르고, 계란까지,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습니다. 이제 모든 재료를 넣었습니다. 꼬들꼬들하게 익어가는 면과 물감을 짜놓은 듯 샛노란 계란 노른자를 바라보며 벌써부터 혀에서는 군침이 돌고 있습니다. 콧등은 시큰해지고 두피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있습니다. 매콤한 냄새를 풍기는 라면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는 냄비를 통째로 식탁으로 가져가 냄비 뚜껑에 면을 옮깁니다. 안경에 서린 김 때문에 뿌옇게 보이는 면을 크게 한 젓가락 들어 올려 후후 불며 입에 넣었습니다. 모든 감각이 깨어나는 것 같은 매콤함과 감칠맛, 익숙한 MSG 맛에 순식간에 라면 한 그릇을 모두 비워냅니다.
라면은 맛있게 먹었지만 요즘 부쩍 배가 나오기 시작한 그는 괜한 죄책감에 운동을 하기로 결심합니다. 운동복을 입고 집을 나선 그. 산들한 봄바람이 기분 좋게 부는 봄날의 오후입니다. 그는 눈송이가 날리듯 벚꽃이 흩날리고 있는 호수길에 도착합니다. 마라톤 선수라도 된 양 멈추지 않고 달리고 싶게 만드는, 기가 막힌 운치의 호수길입니다. 천천히 달리기를 시작했고 금세 기분이 좋아집니다. 눈앞에 떨어지는 벚꽃이 꿈만 같이 느껴집니다. 식후에 바로 달리느라 약간은 힘들었던 몸이 어느 순간을 넘으면서 편해지기 시작합니다. 길 위에 오직 나와 벚꽃만 있는 듯 몸이 가벼워지고 모든 풍경이 느리게 지나가기 시작합니다. 눈을 감아도 달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입니다. 몸이 붕 뜬 것 같기도 하고 곧 잠에 빠질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몸이 움직여 달리기를 이어하고 있는 것을 깨닫습니다. 어느 순간, 아주 잠시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았는데 그는 하늘을 보고 있습니다. 자신이 길 위에 누워있는 것을 깨닫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멀리서 사이렌 비슷한 소리를 들은 것 같다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그의 의식은 바닥 저 깊은 곳까지 한 없이 내려갑니다.
남자는 음식 의존성 운동 유발성 아나필락시스 환자다. 갑자기 뭐라고? 천천히 다시. 음식 의존성(Food Dependent), 운동 유발성(Exercise Induced), 아나필락시스(Anaphylaxis). 음식과 관련한 아나필락시스인데 운동을 통해서만 유발되는 특이한 아나필락시스를 말한다. 내가 진료했던 분의 사례를 상상을 더해 각색해 봤다. 라면 먹고 뛰었다는 것만 기억하고 벚꽃이 아름답게 날렸는지, 기가 막힌 트랙이었는지, 라면을 정말 저렇게 좋아하시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길고 특이한 이름을 가진 질병이다. 먼저 아나필락시스라는 것을 쉽게 설명하자면, 알레르기 반응이 전신으로 심하게 진행해서 호흡, 혈압, 심박 등 생명과 직결되는 부분까지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를 말한다. 두드러기와 같은 피부발진과 복통, 구토 등도 흔하게 동반한다. 해마다 성묘철에 벌쏘임으로 발생하는 사망사고가 대표적인 예이다.
음식 의존성 운동 유발성 아나필락시스(FDEIA)의 대표적인 원인 음식은 밀가루다. 그래서 밀가루가 원인인 경우에는 밀가루 의존성 운동 유발성 아나필락시스(Wheat Dependent Exercise Induced Anaphylaxis, WDEIA)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른 원인들은 워낙에 드물고 검사로 찾기도 어려워서 밀가루와 관련된 경우만 잘 알려져 있다. 이 질환의 아주 특이한 점은 밀가루를 먹기만 했을 때, 혹은 밀가루 음식을 섭취하지 않은 상태에서 운동만 했을 때는 증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밀가루를 먹고 짧은 시간 안에 운동을 할 때만 증상이 나타난다. 환자는 밀가루 안에 들어있는 omega-5-gliadin이라는 미세단백질에 알레르기가 있는데 일반적인 소화 과정에서는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소화가 이루어지기 전 운동을 하면 위산 분비 저하와 장투과성 증가로 알레르기 항원이 구조가 변하지 않은 채로 흡수되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게 된다. 특별한 치료법은 없으나 밀가루 섭취와 운동을 조심하며 지내면 아무 문제 없이 지낼 수도 있다.
'의심할 수 있어야 찾을 수 있다'라는 출처 없는 격언이 의사들 사이에서 대대로 전해진다. 대표적인 질환이 음식 의존성 운동 유발성 아나필락시스가 아닐까 싶다. 밀가루 먹고 운동하다 쓰러졌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이 질환에 대해 전혀 모른다면 진단도 어려울 것이다. 한 번이라도 이 질환을 진단해 봤다면 다음에도 반드시 의심할 수 있다. 병력이 분명하고 특이해서 잘 잊지 않는다.
자, 이제 이 글을 읽었다면 누구나 기억할 수 있다. 어느 날, 주변 누군가가 운동 중에 쓰러졌다는 경험담을 듣는다면, 이 길고 어려운 이름을 가진 질병에 대한 한 조각 희미한 기억이 고개를 들 것이다. 누가 알겠는가. 밀가루를 좋아하고 운동을 좋아하는 소중한 누군가를 여러분이 살리게 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