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의 이름이 없었다는 사실에 계속 마음이 쓰였다. '이름이 없어서 길고양이로 접수했습니다'라는 수의사의 말이 머리에 맴돌았다. 길에서 살다 죽는 수많은 길고양이의 운명을 생각했다. 어떤 고양이도 길에서 태어나 춥고 덥고 배고프게 살고 싶지는 않을 텐데. 그 많은 고양이들을 도울 방법은 없을까. 내가 고양이를 더 힘들게 만든 건 아닌지도 생각했다.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한 고양이가 조용히 생을 마감하고자 했는데 억지로 사람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건 아닐지. 고양이의 운명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굴려가며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던 바로 그때, 그 전화가 왔다. 병원에서 오는 전화는 좋은 일일 때가 없다. 언제나 나쁜 소식을 전해야 할 때 전화를 하기 마련이다. 좋은 소식보다 나쁜 소식이 항상 더 급한 법이기 때문에. 휴대폰에 동물병원의 전화번호가 갑자기 찍혔을 때 이미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고양이의 끝이 다가오는구나.
"길고양이 심장이 멈춰서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어요." 누군가가 말했다.
"그만 중단해 주세요." 조금도 고민할 이유가 없이 심폐소생술을 중단해 달라고 요청했다. 고양이에게도 심폐소생술을 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미리 알았다면 '연명치료거부 동의서'(동물에게도 그런 것이 있다면)라도 쓰고 왔을 것이다. 고양이는 언제 심장이 멈춰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처음부터 상태가 좋지 않았고, 심폐소생술을 하면 할수록 장기부전이 더욱 악화되어 결국은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지금 하는 소생술은 고양이를 오히려 괴롭히는 일이었다. 혹시라도 기적처럼 살아난다 해도 심정지동안 발생한 뇌와 중요 장기의 산소공급 중단으로 후유증이 남을 것이 분명했다. 사람이라면 그렇게 살아나서 각종 기계를 주렁주렁 달고도 결국은 회복하고, 후유증으로 누워서만 지낼지언정 삶을 유지하는 것도 가능할 수 있지만 동물은 그런 삶을 이해할 수도, 그렇게 살 수도 없을 것이다.
심폐소생술을 중단했고 고양이의 심장은 그대로 멈췄다. 나와 고양이의 짧은 만남은 그렇게 끝났다. 나는 고양이의 마지막을 보러 다시 병원에 가지는 않았다. 감사하게도 동물병원에서 간소하게나마 고양이의 장례를 해주겠다고 했는데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고양이는 떠나갔지만 고양이에 대한 생각이 쉽게 떠나지 않았다. 이것도 이별이라고 슬픔과 먹먹함이 하루 내내 있었다. 그리고 한편에는 죄책감이 있었다. 고양이의 조용한 죽음을 오히려 방해한 것만 같아 미안했다. 사람 손에 억지로 잡혀 낯선 병원에서 아픈 검사를 받고 주사에, 심폐소생술까지. 고양이에게 잘한 일일까. 그 생각이 하루 종일 나를 따라다녔다.
문자와 사진이 도착했다. 작은 관에 하얀 꽃과 함께 가지런히 누워있는 고양이의 사진. 동물병원에서는 이름이 없는 고양이에게 '숨'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고 했다. 내가 일하는 병원은 알레르기와 천식 환자들이 호흡을 더 잘할 수 있게 만들겠다는 의미로 병원 이름에 '숨'이라는 단어가 들어간다. 나를 아는 일부 동물병원 직원들이 고양이 이름을 그렇게 지어줬다.
고양이에게 드디어 이름이 생겼다. 이미 떠난 고양이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이름만으로도 위로를 받았다. 고양이를 오히려 힘들게 했다는 죄책감도 털어버리기로 했다. 마지막 가는 길, 추운 밖에서 두려움에 떠는 것 대신 따뜻한 병원에서 마지막 숨을 내쉬고 갔으리라 생각하기로.
고양이가 죽으면 가는 '고양이별'이 있다는 이야기를 믿지 않지만 그날은 처음으로 고양이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곳에서는 따뜻하고 편한 숨만 쉬는 '숨'이가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