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고 싶은 소식을 노심초사 기다리던 때가 있었다. 매일 같이 기다리던 소식은 우리 아기들의 소식. 두 딸의 소식이었다.
이란성쌍둥이인 아기들은 성격이 급한지 예정보다 빨리 세상에 나왔고 대학병원의 신생아 중환자실에 바로 입원했다. 아기들이 입원한 병원은 주 2회만 면회가 가능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소식은 문자나 전화로 들었다. 사소한 일로는 연락이 거의 오지 않았고 중요하게 상의할 일이 있거나 필요한 물품이 있을 때만 연락을 받았다. 아마 중요한 일이라는 건 대부분 안 좋은 소식일 것이고(병원에서는 언제나 그렇듯이), 그래서 신생아 중환자실에 있는 아기들에게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들었다.
한동안은 계속 무소식이었다. 기뻐할 일이었다. 아기들이 잘 지낸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오전 10시에 정확하게 보내주는 몸무게, 오늘의 수유량이 쓰여있는 문자가 나와 아내가 듣는 소식의 거의 전부였다. 가끔 신생아실에서 전화가 올 때면 사실 그렇게 반갑지는 않았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덜컥 겁부터 났다. 필요한 물품이 있어 전화를 한 것이라면 안도하고 기쁜 마음으로 전화를 끊을 수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걱정할만한 소식을 전해주면 불안해하며 다음 전화만 기다렸다. 그렇게 한 달쯤 지내다 보니 무소식이 희소식인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나와 아내는 소식이 듣고 싶었다. 우리 아기들의 지극히 평범한 어떤 소식이라도 더 듣고 싶었다. 숨은 잘 쉬는지, 잘 먹고 잘 자는지, 잠이라는 걸 구분해서 잘 정도로 안정적으로 지내는지, 어떻게 움직이고 무슨 소리를 내는지. 모든 것이 궁금했다. 의학적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어서 의료진들에게조차 무시받는 작은 행동들과 소리들까지도 다 알고 싶었다.
부모의 마음을 안다고 하기에는 아직도 철없는 아들이고, 남편이자, 하고 싶은 것이 많아 더 오래 청년이고 싶은 한 명의 아저씨일 뿐인데, 나의 세상은 변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변했다. 지켜야 하고 살려야 하는 가족이 한 번에 둘씩이나 생겼다. 그들은 다른 아이들보다 한 없이 약한 상태로 세상을 만났지만, 최선을 다해 세상을 살아내고 있었다. 아기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기에 아빠인 나는 더욱 힘을 내야 한다고 매일 같이 다짐했다.
소식을 듣고 싶다. 희소식만 듣고 싶다. 그렇지만 아무 의미 없는 소식도 듣고 싶다. 그들의 세상이 궁금했다. 모두에게 의미가 없어도 나와 아내에게는 의미가 있다. 그들이 잘 있다는 소식은, 그것이 무소식일지라도 우리의 세상이 아직 괜찮다는 최고의 희소식이었다.
무소식을 기다린다. 희소식인 무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