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많은달 Oct 27. 2024

어쩌다 시작된, 나의 두 번째 직업

2화. 방학 있는 사서가 되겠습니다

비록 이과생스러운 과목이 수두룩했지만, 책을 좋아 선택할 직업이 아니란 것도 애초에 알게 됐지만 문헌정보학이란 학문은 재미있기도 했다.

특히 <도서관과 사회> 수업은 꽤 흥미로웠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도서관의 사회적 역할이 어떻게 변해 왔는지, 왕족이나 학자 등 특수한 계층이 아니면 이용할 수 없었던 귀중한 책이 어떻게 모든 사람의 손에 들리게 됐는지 이런저런 역사 이야기를 들으면 수업 시간이 빨리 흘러가기도 했다. 또 책의 내용을 이해하고 내용에 따라 분류하고 정리하려면 다방면에 높은 지식이 필요했기에 고대 사서는 뛰어난 학자였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현대 사서의 역할을 다시금 생각해 보기도 했다. 집에 와서는 그간의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 폴더를 뒤적이며 수업 시간에 교수님이 언급하신 도서관들을 살펴봤다.

“아, 켈수스 도서관이 이런 모습이었지!”

그늘 하나 없는 뜨거운 태양 아래 튀르키예 에페소스 유적지를 돌아다닌 보람이 있었다.

“아, 바티칸 도서관의 시스티나 홀이 이렇게 화려했었지!”

로마 교황청의 바티칸 도서관을 보기 위해 긴 줄을 서서 기다린 보람도 있었다.


수업에 들어오시는 문헌정보학 교수님들은 우리에게 주제전문사서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주제전문사서란 특정 주제에 관한 지식을 소유하고 관련 주제 자료를 수집하여 전문적인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이용자에게 원활하고 수준 높은 정보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서를 말한다. 음, 문헌정보학 책에 나온 문장들이 대체로 이렇다.

여하튼 주제전문사서는 특정 분야의 학위나 전문적인 자격을 갖추면 된다. 미술전문도서관에 미술에 관한 탄탄한 지식이 있는 사서가 있다면 이용자가 요구하는 정보를 훨씬 더 매끄럽게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학우들은 <주제별 정보자료론> 수업을 들으며 저마다 자신의 전공을 떠올리며 주제전문사서를 꿈꿔 보기도 했다.

점점 1년 과정의 끝이 보이고 있었다. 개인별 발표 과제가 주어졌다. 그중 하나가 나를 한참이나 고심하게 했다. 발표 주제는 ‘어떤 정보 서비스를 하는 사서가 될 것인가’였다. 한마디로 어디서 일하고 싶냐는 거다.

책으로 가득한 멋진 도서관에서 일하고 싶다는 막연한 기대 하나로 온 나에게 사서교육원의 과정은 꽤 많은 고민을 안겨 준다.

난 어떤 분야의 정보를 체계적으로 큐레이션 할 수 있을지, 어떤 이용자에게 전문적인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지… 노트북 안의 커서가 30분째 제자리에서 깜박이기만 했다.


결국 내 전공과 경력으로 어떤 사서가 될 수 있을지 아니 되고 싶은지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난 다급히 ppt를 만들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학점을 받기 위한, 과제를 위한 과제였다.

발표의 시간이 다가왔고 내 차례가 되었다. 발표하는 내내 목소리에 자신감이 없었다.

“전 여성학 전문사서가 되면 어떨까 합니다. 서울에 성평등 도서관이 있는데, 이런 도서관에서 세계의 여성주의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고 이용자들에게 체계적인 정보 서비스를 할 수 있다면… 음… 제가 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꿈에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여성학 전문사서였다. 그래도 공부한 것과 연관은 지어야 할 것 같았다. 사실 함께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다들 관련 분야로 자리를 잡았다. 누군가는 여러 권의 여성학 관련 책을 저술한 연구자가 되었고, 누군가는 연구기관에 가 있고, 누군가는 대학에서 여성학 강의를 하고 있다. 하지만 난 여성학으로 밥 법어 먹을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당시 내 고민의 답을 찾기 위해 공부를 했지만, 내가 평생 서 있어야 할 무대는 아닌 것 같았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난 언론정보학이라는 학부 때의 전공도, 여성학이라는 대학원에서의 전공도 내 것으로 만들지 못했던 거다.


얼른 발표를 끝내고 싶었다. 세계의 여성주의 도서관을 소개하고 그곳에서 어떤 서비스가 이루어지는지, 그리고 한국에 성평등 도서관이 얼마나 필요하고, 내가 그곳에서 얼마나 제대로 된 전문 서비스를 할 수 있는지까지 설명을 마치자, 교수님은 고개를 끄덕이셨다.

계속 학우들의 발표가 이어졌지만 하나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엔 물음표가 계속 떠다녔다. 난 어떤 사서가 되고 싶은 거야?

그때였다.

“저는 초등학교 도서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내리깔고 있던 눈동자가 저절로 치켜 올라갔다.

‘초등학교에 도서관이라고?’

항상 내 뒷자리에 앉던 전공은 수학교육이라던 나이가 좀 있는 여성 학우였다.   

“저는 교원자격증으로 초등학교 도서관에서 일하고 있어요. 사서 자격증이 없어도 채용이 되던 시절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사서로서 제대로 일하고 싶어 이곳에 왔습니다.”

난 기억을 더듬었다. 내가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를 다녔던 시절에 학교와 도서관은 상상할 수 없는 조합이었다. 중학교 때는? 음…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고등학교 땐? 있었다. 하지만 점심시간 때만 개방하는 그야말로 유명무실한 곳이었다. 그렇게 학창 시절 도서관에 대한 기억이 빈약한 내게 학우의 발표는 신선하게 다가왔다.

발표를 마치고 돌아온 뒷자리의 학우에게 수고했다는 눈인사를 하며 물었다.

“요즘 초등학교에 도서관이 있나요?”

쉬는 시간을 이용해 학우가 들려준 정보를 거칠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요즘 학교마다 도서관이 다 있고 그곳에서 일할 사서를 교육청에서 채용한다고. 경쟁이 꽤 치열한데 합격하면 초등학교나 중학교로 갈 수 있고 방학 땐 일을 하지 않는다고.

순간 내 귀에 확 꽂히는 단어가 있었다. 방학! 그 아련한 추억의 단어!


방학 때 일하지 않는다는 말 뒤에 월급이 없어서 단점이라고 했는지 쉴 수 있어서 장점이라고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외출만 하고 돌아오면 누워 시간을 다 보내기 일쑤고 밤 9시면 눈이 감기는 기초체력이 심히 떨어지는 나에게 방학이란 단어는 영롱하게 빛나는 그 무엇이었다.

‘요것 봐라! 방학 있는 직업이 이렇게 내 곁에 가까이 있었다니!’

그날부로 난 마음에도 없는 여성학 주제전문사서를 지우고 ‘진짜’ 목표를 마음에 새겼다. 방학이 있는 사서! 만약 다시 수업에서 발표할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저는 방학 있는 사서가 되고 싶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어쩌다 시작된, 나의 두 번째 직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