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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인데 노매가리

행복한 발가락 두 번째 이야기

by 요인영


생애 처음 투표를 마친 고3동동이.


발걸음이 가볍고 통통 튀는 것이 급똥이라도 해결한 사람 같다. 한의사 쌤이 경악을 금치 못하는 맥박의 소유자인 동동이는 근래 쓰나미처럼 덮친 수행(평가) 때문에 불안의 늪에서 허덕이다 체력이 곤두박질쳤다. 다크서클이 우포늪처럼 깊고 짙었지만 표정만은 밝은 것이 앞으로 올 새 정치의 서막을 알리는 것 같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나 인간은 한 치 앞도 못 보는 존재. 투표 다음날이 6월 모의고사인 것은 아마도 잊은 듯 보였다.


동동이는 사용상 주의사항이 있으니 계획이 어그러졌을 때 잠시 자리를 비우셔도 좋다. 상황이 매우 어그레시브 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디폴트 값인 아이에게 말도 안 되는 꿈과 희망을 심어줘라.영끌하지 않으면 다리에 돌을 묶고 깊은 저수지로 겨 들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확진자 동선 같은 아이의 글쓰기에 토 달지 말 것을 요청드린다.


위의 글쓰기 경향은 초딩시절 일기에서부터 드러났다. 자신의 일상을 사진 찍듯이 그러면서 감정은 하나도 담지 않고 시간과 순서에 따라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적었으니 이른바 일기라 쓰고 사건기록지라 읽겠다. 그 시절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오해하지 마시길 저는 아이의 일기 훔쳐보고 그런 사람 아닙니다. 남의 쓰레기통 뒤져서 머한다고. 쓰고 나면 놓고 갔다고요. 읽으라고.


주의사항 다시 이어간다. 내성적인 아이이나 관종끼를 주체할 수 없다. 춤추고 노래하게 풀어줘라. 구지가를 부르며 전현무춤을 추는 사람을 상상하면 이해가 빠르다. 남들이 뛸 때 같이 뛰려 하면 목덜미를 빠르게 낚아챈다. 같이 뛰게 하면 죽을 수도 있다. 친구들이 마라탕을 먹는다고 마음이 약해져 같이 보내면 그날은 응급실에서 밤을 지새울 것이다.

"잘 들어. 네가 사는 세상에는 마라탕! 떡볶이! 불닭! 은 존재하지 않아. 없는 거야."


동동이는 머리가 하얘질 때가 있다. 이것은 신체적인 증상이 아니라 사고치기 직전의 머리상태를 말한다. 반드시 주변의 도움을 요청하라. 차를 부수거나 차를 부순다거나 차가 부서질 수 있다.



재미로 주워섬기자면 남편은 잇팁(ISTP)이고 글쓴이는 인티제(INTJ)되겠다. 그 사이에서 딸인 잇티제(ISTJ)와 아들인 인팁(INTP)이 나왔다. (자식이 둘이지요) I 심은 데 I 나고 T 심은 데 T 났다는 험한 소리는 삼가주시 길 부탁드린다.


잇티제(ISTJ)의 상당 부분 피곤한 성격은 대략적으로 알고 계시리라 맘대로 생각하며 만일 잇티제인 동동이의 부모가 F였더라면 어쩌면 매일이 눈물바람, P성향이었다면 맞불을 놓다가 부모가 아니라 아이가 뒷목 잡고 쓰러지는 상황을 맞이했을 수도 있으리라.


그 표면 아래서 자글자글 끓어오를 듯 말듯한 분노를 잘근잘근 밟아 끄려면 잇티제보다 빠른 판단과 문제 해결능력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계획에 필요한 모든 준비와 계획이 어그러졌을 때 모든 대비를 마련해 놓지 않으면 귓가에

"구하구하 수기현야

약불현야 번작이끽야

구하구하 수기현야

약불현야 번작이끽야"

같은 주술이 맴돌기 때문이다.

학씨! 거북이 같은 것이.


동동이는 나와 모양만 슬쩍 다른 패턴 같다. 그 아이의 잔소리가 편한 이유는 잔소리에 쓸 에너지가 없는 나를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편과 아들에게 잔소리를 날리고 있는 동동이를 바라보는 내 입가엔 은은한 미소가 걸려 있다. 이런 걸 손 안 대고 코 푼다고 하던데.


잇티제(ISTJ)와 잇팁(ISTP)은 가끔 서로를 한심한 눈길로 바라보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동족혐오란 저런 것이구나' 알게 된다.


정리된 환경이 아니면 한껏 예민해지고 잔소리 청정구역인 집안에서 유일한 잔소리꾼인 동동이. 그러다가 참으로 어이없게 '그럴 수 있지!'로 어그로를 끈다. 불평등과 불합리함을 보면 밥 숟가락을 '탱' 놓고, 정치인을 보면 '저 사람은 왜 저래!' 하다가도 평화를 사랑한다고 외치는 동동이는 교육부장관이 꿈이다.


"장관은 정치야" 했더니 "그럼 차관?" 이러고 있는 단순한 아이기도 하다. 또 다른 꿈인 계획 없이 살아보기

계획 없이 살기는 '거지보다는 공주'가 나을 텐데 '공주보다는 거지'가 편하다고 말해본다. 말만 주둥이만.


맥이 일자로 뛰어서 노매가리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한약을 물처럼 마신다. 그 한의사쌤이 아니었다면 병원에 수천만 원 기부할 뻔한 아찔한 기억도 있다.


고3인데, 이런 내용만 쓰기야? 하신다면 미안하다. 딱히 해 주는 게 없어서 그렇다. 혹시 수험생 식단, 수험생의 하루, 수험생의 정신상태 뭐 이런 거 궁금하신가?





행복한 발가락

침대 위에 놓인 아이의 발가락이 까딱까딱 움직이는 걸 본 날이에요.

그 발가락에서 감정이 느껴졌어요. ‘지금 행복해하고 있구나.’

행복한 발가락을 포착한 순간들을 글로 씁니다.

마음먹으면 언제든 발가락을 까닥거릴 수 있는 어른이 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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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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