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동동이 8체질 검사하다
고3 엄마스럽게 동동이의 8체질 검사를 받으러 갔습니다.
세상과의 불화를 꿈꿔서 그런지 동동이의 세상은 자주 팽팽 돕니다.
“그냥 하루를 끝내고 싶다”라고 말하길래
요즘 듣는 노래가사인 줄 알았더니 푸념 짜증 우울이었습니다.
집에 있는데도 집가고 싶다고 말하는 애들 집에 하나씩 키우고 계시죠?
늘 가는 한의원 쌤은 ‘그런 체질이 있다’ 말씀하셔서
‘세상이 뱅글뱅글 돌고 그냥 하루를 끝내고 싶은 체질이 있다고요?’
납득이 안되면 못 참는 48세는 고3 딸을 데리고
8체질 전문 한의원을 찾아갑니다.
집 근처에 있길래 슬리퍼 신고 갔지요.
검사 비용이 5만 원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차려입고 왔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이런저런 검사를 합니다. 빠르게 진행되어 무슨 검사를 했는지 잘 모르겠어요.
정보성 글을 써야 조회수가 잘 나온다던데, 글러먹었어요.
마지막으로 맥을 짚습니다.
역시나 동동이의 맥을 짚은 한의사쌤 경악을 금치 못하십니다.
어쩐지 안 들어도 알 것 같은 내용을 프린트물을 보며 설명해 주십니다.
역시 엄마들은 자식 한정 반의사가 맞나 봅니다.
녹용이 좋은 건 알겠는데, 어쩐지 녹용이 무서워져 손절 후
누구보다 빠르게 동동이를 낚아채어 한의원을 빠져나옵니다.
'동동이는 토양이다'라고 쓰인 A4용지 네 장을 휘날리며 집으로 돌아옵니다.
오늘의 소득은 이면지다. 구관이 명관이다. 한눈팔지 말자.
8체질 검사가 아니어도 동동이의 몸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약을 잘 지어주시는 한의사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래도 프린트된 내용을 자세히 살펴봅니다.
토양인의 감정을 살펴봅니다.
감정적으로 터뜨리는 것은 슬픔이요. 깊이 간직하는 것은 노여움이다.
감정기복이 심하여 우울증이나 불면증 같은 스트레스성 질환이 쉽게 발생한다.
심지어는 공황장애를 호소하기도 한다.
우리네 한을 표현한 것인가.
처세 부분을 살펴봅니다.
모든 일은 쉽게 시작하는 반면 쉽게 포기하는 경향성을 보이며,
자기 일보다 남의 일에 신바람을 내며 실속 있는 일보다
남이 알아주는 것을 기뻐하고, 집안일보다 바깥일을 좋아하는 성격이다.
두뇌회전이 빨라 순간 대처력 및 기억력이 좋으나
마무리를 잘 못하는 성향이 있다.
그러므로 정신적이나 육체적으로 지구력을 기르는 게 좋다.
이 집 용하네.
체형을 살핍니다.
대개 살찌거나 토실토실한 사람이 많다.
일반적으로 얼굴이 둥글고 큰 편이며, 가슴이 원통형으로 큰 편이다.
배가 나온 사람이 많고 팔다리, 허벅지가 굵다.
역시 거북이 물개 수달 너구리가 맞았어.
질병을 살펴봅니다.
매운 음식을 즐겨하면 속이 쓰리거나, 위염 또는 위궤양이 생길 수 있으며,
위암도 드물지 않다. 운동을 게을리하면 비만이 잘 되는데,
살이 찌면 좀체 빠지지 않는 경향이 있다.
잘 흥분하여 심계항진, 불안등이 나타날 수 있다.
가정불화나 장기적인 스트레스에 처하면
화병, 우울증 같은 정신적 고통을 겪는다.
다한증을 가진 사람이 눈에 띄는데
특히 긴장하거나 신경을 쓰면 땀이 많이 흐른다.
닭살 피부가 흔하다.
"잘 들어. 네가 사는 세상에는 마라탕! 떡볶이! 불닭! 은 존재하지 않아. 없는 거야."
토양인의 이로운 음식이 맘에 안 드는 동동이
토양체질을 안 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래도 돼지고기가 있어." 위로를 건네봅니다.
"다이어트가 잘 안 되어도 핑곗거리가 생긴다"라고 옆구리를 찔러봅니다.
"원래 살이 잘 안 빠진대."
시무룩한 것이 고추 없는 세상에서 사는 것이 많이 서운한 모양입니다.
예전에 동동이에게 이런 말을 들었어요.
"나한테 신경 좀 써." 이게 고1 때였어요.
서로 잘 알고 있으니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지금도 표현을 잘 못합니다.
감정표현도 안 하고 잔소리도 안 하다 보니
정작 해야 할 말도 안 하고 산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않아요.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상대는 모를 수 있음을 늘 잊습니다.
알고 있어도 듣고 싶다는 것을 무시합니다.
잔잔하고 평온한 일상을 위한 일관성은 아이에게 사춘기 내내 차갑기만 했을 거예요.
겉은 자랐지만 속은 야리야리하기만 한 아이를
수시로 안아주고 쓰다듬어주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생크림처럼 풍성한 잔소리를 얹는 것도 잊지 않았지요.
표현을 거부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거리를 유지하는 동안 아이는 감질나게 불어오는 바람에
짜증이 늘어가고 어쩌면 벽을 쌓았을지도 모릅니다.
바람의 세기를 적절히 조절하는 일 또한 부모의 일임을
게으른 나는 잊고 있었어요.
예민한 아이의 문은 조용히 열리고 금세 닫힙니다.
그 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해요.
아이들은 스스로 성장하고 만들지만 문 뒤에 숨기도 하고,
갇혀서 오랜 시간을 나오지 못하기도 해요.
내가 거리를 두어 미세한 열림과 닫힘을 인식하지 못했던
3년의 시간이 나한테 신경 쓰라는 아이의 한마디에 담겨 있었어요.
문이 열리길 줄곧 기다려서도
닫혔다고 문을 두드리지도 말아야 하는데,
문틈에 끼일 수도 있는 지난한 과정을
수차례 반복해야 하는 것이 부모이겠죠.
왜 매일 힘들어할까?
왜 매일 아플까?
왜 잠을 자지 못하나?
그 상태가 그저 타고난 상태라면 어떤가요.
살다가 질병에 노출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저 타고나길 그리 태어난 사람.
생김새가 그렇듯 목소리가 그렇듯
인위적인 방법으로 혹은 노력의 방향이 맞아 변화를 줄 수도 있겠지만
에너지가 부족한 사람은 그저 하루를 살아남은 것만으로 격려해줘야 해요.
어떤 식으로 하루를 보냈건
오늘 하루도 수고했다고 잘 보냈다고 담백하게 말해줘야 해요.
토양이의 식단을 보며 든 생각입니다.
작물이 쑥쑥 자라 잘 맺히는 토양과 기후가 있듯이
동동이는 이런 음식을 먹을 때 혹은 먹지 않을 때
조금은 편안해질 수 있겠구나.
뭐든 도구로써 잘 사용하고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면 편해집니다.
'이대로 먹어보니 어때?'
동동이 왈 "학원에서 방귀를 덜 뀌어."
배를 동동 두드리며 웃습니다. 조금 멋쩍게
미리 준비해 보는 수능도시락
녹두보리밥
콩나물국
돼지고기간장볶음
청경채 굴소스볶음
우엉채조림
계란말이
베리샐러드
냉녹차
여러 가지 수를 조합해 차려보고 속이 편안한 음식으로 준비할 생각이에요.
이 과정도 즐겁네요.
행복한 발가락
침대 위에 놓인 아이의 발가락이 까딱까딱 움직이는 걸 본 날이에요.
그 발가락에서 감정이 느껴졌어요. ‘지금 행복해하고 있구나.’
행복한 발가락을 포착한 순간들을 글로 씁니다.
마음먹으면 언제든 발가락을 까닥거릴 수 있는 어른이 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