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하다 지치고 불안할 때
공부하다 지치고 불안할 때 동동이는 '구운몽'을 읽습니다.
녜 그 구운몽 맞아요. 조선시대 김만중이요.
왜 구운몽인지 물었더니 논두렁밭두렁심드렁하게 "엄청 재밌다"고만 답합니다.
설명하기 귀찮은 눈치여서
소설과는 무관하지만 불안과는 관련이 깊은 '나'에 관한 대화를 시도해 봅니다.
야매심리분석관이 또 가동되는 순간이죠.
너나 할 것 없이 끊임없이 ‘나’를 얘기합니다.
그러다 잠시 나의 사용을 중단하면 문득 공간이 넓어짐을 느끼게 되죠.
상대를 바라보고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동동이에게 말합니다.
"문장에 ‘나’를 덜 써보는 건 어때?"
그게 무슨 말이야? 하고 묻는 대신에 "그럼 ‘나’는 언제 써?"라고 묻습니다.
‘나’를 덜 쓰는 것에 꽂혔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일기 쓰는 시간이 조금 더 길어집니다.
처음 내게서 ‘나’를 바라보기 시작하던 때를 떠올려보았어요.
사람과 대화를 하다 보면 끊임없이 ‘나는 무엇을 했고’, ‘나는 어떻게 생각하고’,
하다 하다 ‘내가 아는 누구는~’이라 시작하며 끝도 없이 나를 말합니다.
끊임없이 살아남아 등장하는 ‘나’라는 것에서
쪼글쪼글하고 볼품없이 줄어든 볼드모트의 이미지가 연상되기도 합니다.
나 외의 존재를 만나는 시간에도 ‘나’만을 얘기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소비함으로써 허전함을 채우려는 행위와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립을 버림으로써 살아남은 놀라운 식물이 떠올랐습니다.
열대우림에 사는 키가 10cm도 안 되는 작은 꽃이 있어요.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부러질 것 같이 연약하며
창백한 꽃자루 끝에 밝은 파란색 꽃이 피는 꽃, '보이리아’, 이 꽃은 아주 오래전에 광합성 능력을 잃었어요.
그러다 보니 식물이 광합성을 할 수 있게 해 주고 식물다운 초록색을 내주는 안료인 클로로필, 엽록소도 잃었
지요. 광합성은 식물을 식물답게 만들어주는 가장 중요한 작용인데, 이 식물은 광합성을 하지 않고도 어떻게
살아남았을까요?
보이리아는 균근이라는 독특한 관계를 통해 진균류에 기생하게 되었어요. 곰팡이와의 연결망을 통해 간접적
으로 유기물을 흡수하며 살아가게 된 거죠. 자립을 버리고 연결로 산다. 언뜻 보면 기생꽃일 뿐이잖아. 하겠지
만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면 생태계 내 다른 존재와의 연결을 이룬 거예요.
숲 속 나무- 곰팡이- 보이리아 사이에는 에너지 흐름의 비가시적 네트워크가 존재하게 된 거죠. 보이리아는
숲의 심장부 네트워크에 은밀히 접속하는 해커 같은 존재가 됩니다. 광합성을 버림으로써 더 깊은 연결과
가능성을 얻은 거죠.
멈추고 비우고 또는 버린다는 것은 가능성의 바다에 나를 던지는 가장 쉬우면서 어려운 방법입니다.
불안함은 두려움의 변주입니다. 인간의 감정은 부정의 정서인 두려움이 전부이며 분노, 질투, 슬픔, 수치심,
불안 모두 두려움이라는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것들입니다. 자기 보존에 대한 위협. 거기에서 비롯된 두려움.
그러므로 '나'의 실체를 정확히 알게 된다면 '알아차리게'된다면 불안함을 덜어줄 수 있지 않을까요.
부정적 정서는 변하지 않는 고정된 실체로서의 '나'라는 개념에서 비롯됩니다.
의식은 여러 종류의 요인들을 엮어서 의미를 부여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냄으로써 '나'를 생산해 냅니다.
고정된 실체라고 생각하는 자아가 사실은 뇌가 만들어낸 환상이며 '일화기억의 집적물' 임을 알아야 해요.
에너지는 초점을 따라 흐릅니다.
끝없이 증폭되는 불안의 가장 큰 원인은 감정에 먹이를 주는 내가 있기 때문이에요. 끊임없이 특정한 생각을
떠올리고 변주하는 동안 그것은 점점 비대해집니다. 애초에 무엇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다른 이야기
가 되어버리기도 하는 것이죠. 그것들을 단단히 자리 잡게 하는 것은 내가 그것과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에요. 티베트의 위대한 라마는
"어떤 생각의 생명은 3분이고 그 외의 나머지는 모두 과장된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먹이를 주지 않는 생각의
생명은 짧습니다.
꼬마보핍의 원리라는 것이 있어요.
꼬마 보핍이 양을 잃어버렸네.
어디에서 양을 찾아야 할지 몰랐네.
그냥 두어라. 그러면 양은 집으로 올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뒤로하고.
그냥 두는 것.
자극하지 않으면 강화되지 않고 강화되지 않은 것은 흘러갑니다.
그냥 두는 것이 힘들다면 이런 방법이 있습니다.
자주 떠오르는 생각에게 마음 한편 자리를 내어주고 이름을 지어 불러줍니다.
밀어내려 하고 생각하지 않으려 하면 더 악착같이 달라붙는 것이 불안의 습성입니다.
투덜투덜 떠벌떠벌 말하게 놓아둡니다.
매일 찾아와도 자리를 내어주고 이름을 불러줍니다.
친숙한 것에는 불안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렇게 공간을 내어주고 존재가 작아진 그것을 그저 바라봅니다.
익숙하게 공간을 차지하고 있지만 존재감은 한없이 작은 예전의 불안.
"그럼 나는 언제 써?"라는 질문에는 이런 답을 줄 수 있게 됩니다.
"나 아닌 것들과 충분히 연결된 뒤에
'나'라는 것이 습관적 이야기의 구조임을 알아차리고
말과 글 속에서 그것을 비워보는 연습을 하고,
어느 쪽에도 머물지 않고 변화하는 나를,
그 또한 흘려보낼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때."라고.
행복한 발가락
침대 위에 놓인 아이의 발가락이 까딱까딱 움직이는 걸 본 날이에요.
그 발가락에서 감정이 느껴졌어요. ‘지금 행복해하고 있구나.’
행복한 발가락을 포착한 순간들을 글로 씁니다.
마음먹으면 언제든 발가락을 까닥거릴 수 있는 어른이 될 수 있도록.
위의 내용은 멀린 섈드레이크의 [작은 것들이 만드는 거대한 세계]
김주환교수의 [내면소통]
[마음챙김과 통찰]에 기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