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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감 높은 아이를 키우는 방법

이라고 어그로를 끌어봅니다만

by 요인영


전 주에 <행복한 발가락> 연재를 못했습니다. 반성합니다. 이번 대선 20대 남성 투표결과를 본 동동이 연애와 결혼을 동시에 포기합니다. 왜냐고요? 보수를 가장한 파시스트 지지자들과는 말도 섞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저 비율이면 3명 중 1명 일 텐데. 하면서. 사실 이 내용을 다루고 싶었어요. 근데 제가 정치저관여층이라 아는 것이 없어 글이 되어 나오지 않았어요. 자료를 찾고 뒤적이다가 울적해져서 그만……! 화가 스멀스멀 올라오는데 그걸 또 글로 설명할 길이 없어서 2차 좌절.

언제 가는 꼭 쓰고 말리라. 이 땅의 파시스트에게 경종을 울리리라 하며 일단 접었습니다.


그래서 이 주제로 방향을 돌렸어요.

짜잔~~ 이름하여 <불안감 높은 아이를 키우는 방법>



나이는 열아홉. 한국의 매우 특수한 지배계층인 고3동동이. 대략 3년 미만의 재임기간 동안 그다지 구미가

당기지 않는 특권(부모가 웬만하면 다 들어줌)을 누리며 고된 임무(수행, 내신, 수능, 면접 등등)를 수행하죠. 책상에 앉은 동그란 뒤태를 보고 있자니 절로 뭔가를 해다 바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노예근성인가?


11년 동안 갈고닦아 내재화된 능력주의는 사실 효율이 좋지 않아 소수의 재능을 가진 몇몇을 빼면 어디 갖다 쓸 때도 없습니다. 부작용만 잔뜩 있는 것이 우리 교육의 결과이기도 한 씁쓸한 현실이죠. 그중 최악의 부작용은 능력주의에 초민감해진 남자아이들의 일부 펨코에서 잘못된 인식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일반화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그들의 박탈감은 우열의식, 강자 동일시, 약자혐오, 동조 습성, 폭력성, 흑백논리로 쉽게 흐릅니다. 아이들은 이상한 나라의 교육시스템에서 그간 너무 힘들어 잠시 넋을 놓고 있었던 결과로 다시 같은 기간을 비용으로 지불하거나 패배자마인드로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런 아이는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비하하고 자책한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인데, 원인은 다른 곳에 있음에도 그마저 보지 못합니다. 불안 하지 않은 사람도 불안하게 만드는 아주 효율적인 시스템이 한국의 교육방식인 것 같습니다.


불안감이 높은 아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대다수 부모들이 그렇듯이 우리 부부도 문제의 원인을 서로에게서찾았어요.

남편은 “내가 어릴 때 딱 저랬었는데 혹시 나 때문일까?” 나는 나 대로 “불안한 환경을 만든 것이 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다 기질과 성격, 성향이 다른 개념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콩 심은 데 콩이 나긴 하지만 주변 환경에따라서 줄무늬 콩이 될지 땡땡이 콩이 될지 알 수 없다는 것이죠.


일 테면 이런 것이에요.

물 자체는 차가울 수도 뜨거울 수도 있고 흐르는 방식도 다르지만 어떤 그릇에 담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모양을 갖게 되죠. 기질은 물의 온도와 점성 같은 것이고, 성격은 물이 담긴 그릇의 형태에 가까워요. 기질은 본래의 흐름이고 성격은 그것이 현실 속에서 굴절되어 드러나는 방식이에요. 같은 물이라도 컵에 담기면음료가 되고, 화분에 담기면 생명을 살리고, 바위틈을 흐르면 침식되죠.


흔히 성격과 성향을 혼동하는데 이 둘도 다릅니다. 성격은 내가 세상에 보여주는 가면이지만 성향은 내가 무심코 바라보는 시선의 방향이에요. 성격은 오랜 시간 사회적 관계를 통해 다듬어진 표현 방식이라면, 성향은 내가 노출하지 않아도 내면에서 일관되게 드러나는 무의식적 기울임입니다. 예를 들어 침착한 성격을 갖고 있어도 갈등 상황에서 언제나 불편을 회피하고 싶은 성향을 가진 사람일 수 있는 것이죠.


지금은 묵직한 동동이도 가볍고 산만한 초등학생시절이 있었으니 담임선생님과의 첫 상담일에 이런 말을 듣게 됩니다.

“아이가 앉아 있는 것을 힘들어해요.”

유치원 때 들었던 ‘소근육 발달이 느리다’는 말보다 0.5초 당황스러웠어요. 지금 동동이를 보면 소근육 발달이 느린 것이 아니라 그냥 '근육자체가 없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하지만. 고3쯤 되면 집에 그런 애들 하나씩 있지 않아요? 사실 느린 게 문제인가 산만한 게 문제인가는 고민도 하지 않았어요. 그런 문제가아니었으니까요.


고민은 깊었지만 결과로 나온 방법은 이외로 간단했어요. 학교를 가고 싶은 시간에 갈 수 있도록 준비하고,준비물은 미리미리 챙겨주었어요.(준비물을 제가 미리 준비할 수도 있었지만 알림장을 보고 같이 챙기거나스스로 챙기게 했어요. 조급함이 덮치기 전에) 등교를 같이 하는 친구를 기다리지 못해 엉덩이가 들썩들썩하면 친구에게 연락해서 양해를 구하고 먼저 보내주었어요.

가장 중요한 것은 “수업 시간에 다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다.”라고 말해 주는 것이었어요. 그곳이 안전한 곳임을 알게 하고 머물러도 되고, 질문하며 관찰해도 되는 곳임을 알려주었지요.


그 후 앉아 있기 힘든 아이는 사라졌습니다. 또래보다 점잖고 어른스럽고 진지하고 성실하며 배려가 돋보이는 아이가 있을 뿐이죠.


그런데 희한한 것은 ‘느리다, 못한다’는 말보다 ‘점잖고 어른스럽다, 성실, 배려라는 말이 더 듣기 힘들었습니다. 그건 그 작고 동그란 아이가 나름대로 해석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처세였으니까요.


동동이는 관찰자의 눈을 갖고 있어요. 자기 앞에 놓인 과제가 해석이 되지 않을 때 불편하며 괴롭습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대방을 바라보지만 질문을 속으로 삼키곤 합니다. 그리고 거리를 두고 해석합니다. 유아일 때는 쉽게 잠들지 못하고 늘 분주했어요. 잘 먹으면서도 잘 토했고, 냄새와 소리에 민감했어요. 지금도 여름철 지하철이나 사람이 붐비는 곳에 가면 정신을 못 차립니다. 그래서 학교에 다니며 누가 건드리지 않음에도 늘 스트레스를 받아요. 냄새와 소리 때문이죠. 시력이 좋지 않은데도 선명한 이미지를 남기기 싫어 안경을 벗고 소리를 차단하기 위해 이어폰을 사용해요.

사실 잘 몰랐습니다.

예민함이 이 정도인 줄은.


제가 생각하는 불안은 예측 불가능성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에 가깝습니다. 실제로 몸에 두드러기가 올라오고 두통, 어지럼증, 소화불량, 몸살, 복통 등이 불안 곁으로 몰려듭니다. 알레르기는 맥락 의존적인데, 여기에 예측 불가능성이 덧붙으면 그건 일련의 통증이 되는 것이죠. 예민한 아이는 그래서 자주 아픕니다. 수명이 다 된 형광등처럼 신체시스템이 멋대로 꺼졌다 켜졌다, 불이 아예 꺼지지 않기도 합니다. 불청객은 수시로 들락날락.

대부분의 무해한 환경에서 홀로 경계경보를 발령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냄새나는 여름 지하철은 대다수에게는 잠시 눈살을 찌푸리고 말 무해한 환경이지만 동동이에겐 말 그대로 지옥철인 것이죠.


불안한 사람을 더 불안하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옆에서 오두방정을 떨며 초조해하는 것입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집 안의 그 누구도 리액션이 좋지 않아요. 무덤덤 그 자체.

양면성이 있는지라 이것이 도움이 되는지 안되는지 판단이 잘 서진 않지만 현재까지는 도움이 된 편.

T심은데 t났다는 험악한 소리는 넣어두시고.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캠핑을 갔는데, 남편이 삼겹살을 굽다가 불을 냅니다. 왜죠?(기름이 너무 많았던 것이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암튼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남편은 외마디 비명을 침착하게 지르고 대피합니다. 아들이 말합니다. 불났다. 딸이 일어섭니다. 아빠 피해. 내가 말합니다. 소화기 가져와. 날랜 아들이달려갑니다. 잠시 불길이 잦아들길 기다리다가 남편이 생수를 들이부어 불을 끕니다. 상황종료. 대체로 문제가 발생했을 때의 저희 가족의 모습입니다.

불안이가 살아남을 수 없는 척박한 환경인 것이죠.


불안감은 어린 시절에 비하면 티가 덜 나지만 여러 통증들이 수시로 나타나는 것을 보면 현재도 진행형인 것 같습니다. 어느 날은 새벽에 소파에 앉아 울고 있었어요. 다섯 시였어요. 울면서 말해요.


"산에 다녀왔어. 새벽인데도 사람들이 있더라."


이어진 내용을 요약하자면, 밤새 잠에 들지 못한 거예요. 잠이 들지 못하는 이유도 산에 가고 싶은 이유도 자세히 말하지 않았어요. 그저 산에 가고 싶었다는 말만 반복합니다. 새벽에 홀로 나가 초입에서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던 거죠. '그냥 산에 올라가지도 못하고 집에 왔다는 얘기잖아.' 할수도 있겠지만, 저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어요.

캄캄한 곳을 무서워하고 그 어둠에서 빛을 보는 것도 쉽지 않아 하는 아이입니다. 사람과 마주치는 것을 꺼려하고, 어깨가 부딪힐까 늘 움츠리고 다닙니다. 지금도 울고 있던 모습이 선명히 떠오르네요.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입에 담고 쉽지 않은 단어가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기우일수도 있겠으나 아이는 감정의 진폭이 크고 민감하여 저는 그 격한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놓치곤 합니다.


간혹 어른들은 아픈 곳을 더 과장되게 표현하기도 하는데 아이는 오히려 축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아예 아프지 않은 척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프다고 아예 드러눕는 경우도 많지만 동동이의 경우는 자신의 상태를 두려워하는 느낌이었어요.




부부가 동동이에게 해 준 것은 안심할 수 있는 영역을 계속해서 확장시켜 주는 것이었어요. 별거 아닌 문제를 내고 “자 오늘의 미션! 카트에 동전을 잘 넣어서 이곳까지 끌어오는 거야.” 같은 아주 사소한 것부터 음식점을 고르고, 여행계획을 짜보는 것에서 시작해 실제로 친구와 여행을 가보는 것. 한 번은 경복궁 가이드를 시켜보기도 했어요.


작은 성공경험의 축적이 선천적 불안으로부터 아이를 지켜주리라 믿는 것이죠.


아들이 하나인데, 넌 누구니?


불안은 가까운 곳에 있지만 아는 척하고 싶지 않은 이웃 같습니다. 전문가에게 데려가지 않는 것이 위험한 선택일 수 있겠으나 저는 세심한 관찰과 기다림 그리고 지식의 힘을 믿습니다. 특히 기다림을 가장 신뢰해요. 성공경험을 통해 긍정적인 서사를 만들어주고, 현재 공부 중인 내면소통 명상을 함께하여 자신에 대해 알게 되면 “나는 왜 불안할까?”라는 질문을 스스로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아이에게 어떤 방법이 더 좋을까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수시에 필요한 모든 시험이 끝난 동동이 어제까지 배 아프다고 오만상을 찌푸리더니 오늘은 깔깔대며 웃고있어요. 내일 모의고사인데......








행복한 발가락

침대 위에 놓인 아이의 발가락이 까딱까딱 움직이는 걸 본 날이에요.

그 발가락에서 감정이 느껴졌어요. ‘지금 행복해하고 있구나.’

행복한 발가락을 포착한 순간들을 글로 씁니다.

마음먹으면 언제든 발가락을 까닥거릴 수 있는 어른이 될 수 있도록.




그림: 요시고/SEOUL, SOUTH KOREA MAY-JUNE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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