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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리 위의 라따뚜이

이분법 그리고 끝없는 범주화의 변주

by 요인영




이 이야기는 첫 투표를 마친 고3 동동이의 연애 및 결혼포기 선언에서 시작되었다.

자신과 별로 나이 차이도 나지 않는 이들이(20대 남성의 투표결과) 왜 그렇게 다른 선택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요지였고, "나는 이 지뢰밭을 피해 갈 자신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장래희망이 스님이셔?", "불교전형이라고 들어는 봤니? 좀 더 빨리 말을 하지 그랬냐"라고 농담처럼 넘겼지만 가볍게 넘기기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왜 그러는지 설명을 해봐. 들어나 보자.



한국 사회에서 20대 남성의 극우화는 분명한 현상이다. 이 현상은 단순히 개인의 일탈이나 비뚤어진 성격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세계적인 흐름 속에서도 유독 한국에서 두드러지는 사회구조적 문제이다. 왜 같은 나이대임에도 여성은 상대적으로 진보적이고 남성은 보수적 혹은 극단적이 되는가. 이 질문을 단순히 정치 성향에서만 찾는 것이 아닌 인간의 뇌 발달과 사회적 구조 그리고 교육 시스템과 엮어서 생각해 보았다.



청소년기의 뇌(보통 10~25세 사이의 뇌를 말함)는 아직 완전히 성숙하지 않았다. 로버트 새폴스키의 저서 [행동]에 따르면 청소년기의 뇌의 핵심 특징을 이렇게 표현한다.


"이미 변연계, 자율신경계, 내분비계가 풀가동 하지만 이마엽 겉질은 이제 겨우 조립 설명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는 사실, 바로 이것이 청소년기가 그토록 절망적이고, 멋지고, 아둔하고, 충동적이고, 고무적이고, 파괴적이고, 자기 파괴적이고, 이타적이고, 이기적이고, 힘들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시기인 까닭이다."


대략 10세에서 25세까지를 청소년기의 뇌 발달기로 보는데, 뇌 발달은 생물학적 사춘기보다 더 길게 지속되며, 어이없게도 이미엽 겉질의 완전한 성숙은 25세 이후에나 이루어진다.

이로 인해 이 시기의 뇌는 감정, 충동, 보상 추구에 쉽게 휘둘리 수 있고, 또래 집단의 평가에 극도로 민감하다. 청소년기의 민감성을 달리 표현하면 '아동이나 어른보다 더 사회적인데 더 복잡하게 사회적'이라 말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이 시기의 사회성은 감정, 그리고 정서적 신호에 대한 반응성'에 치우쳐 있다. (새폴스키는 저서에서 과도한 일반화는 하지 말아 주길 요청하지만) 또 여성의 전전두엽 발달이 남성보다 더 빠르다는 연구는 왜 여성들이 이른 시기부터 더 신중하고 공감적이며 진보적 경향을 보이는지를 설명해 준다.


이렇게 뇌 발달과 성별 차이가 존재하는 한편 사회 구조는 이를 더욱 왜곡시킨다. 한국의 교육은 '비판적 사고'보다는 '경쟁과 서열화'에 집중한다. 단 한 번의 시험으로 인생이 결정되며, 이 과정에서 성적이 곧 인간의 가치로 간주된다. 김누리 교수는 한국이 군사독재를 넘어 민주주의 국가가 된 것이 아니라 전기 파시즘(제도적 독재 체제)에서 후기 파시즘(문화, 태도 중심의 파시즘)으로 옮겨간 사회라고 분석한다. 제도상으로는 민주주의가 실현되었지만 서열, 경쟁, 강자 숭배, 약자 혐오, 동조 강박과 같은 문화적 파시즘의 흔적이 교육과 사회에 깊이 내재되어 있다는 설명이다.


이 교육 시스템은 청소년기의 미완성된 뇌에 무엇을 새겨 넣는가. 약자를 배려하기보다는 이겨야 살아남는 생존 전략, 공감을 배우기보다는 동조를 강요받는 사회성, 질문보다는 정답을 요구하는 구조, 이 시스템 속에서 성장한 아이들은 상대적 박탈감과 억울함을 내면화한다. 남성에게 부여된 전통적인 역할은 이미 무너졌고,

군복무와 같은 국가적 의무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이 불균형은 남성들로 하여금 페미니즘을 '역차별'로 인식하게 만들며, 자신들의 위치가 위협받는다는 감각을 더욱 자극한다. 반면 여성들은 오랜 시간 차별과 억압의 구조 속에서 살아왔기에 불평등에 민감하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공감 능력이 더 강하게 형성되었다. 여성들은 고통의 경험을 통해 더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요구하게 되었고, 진보적 가치를 지지하게 된다.



난리났네 난리났어!


문제는 이러한 남녀 간의 감각 차이가 점점 더 갈등으로 번지고 있다는 점이다. 20대 남성은 변화 속에서 자신을 상실한 채 분노하고, 여성은 변화 속에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자신의 머리 위에 올라탄 쥐가 사회 구조이고 교육이고 부모 세대의 가치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쥐는 나를 대신해 요리를 하고 나는 그 요리가 내 선택이라고 착각한다. 결국 이대남 현상을 이해하려면 단지 그들의 발언을 문제 삼는 것보다, 그들을 만들어낸 구조를 들여다봐야 한다. 한국 사회는 구조적 불평등을 남녀 갈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으며 이는 정치적 전략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진짜 해결은 갈등을 부추기는 결말이 아니라 그 안에 숨은 구조적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보는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를 오랫동안 묶어온 파시즘적 교육시스템, 인간을 성적으로 줄 세우고 서열화하는 그 낡은 질서를 걷어내야 한다. 사람은 등수 매기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누군가의 고통에 가 닿을 수 있고, 함께 살아갈 길을 찾을 수 있는 존재다.


이제 진짜 요리를 만들 시간


독일의 교육처럼 경쟁이 아닌 감수성과 비판적 사고를 중심에 두는 교육이 필요하다. 인간은 줄 세우기 위한 존재가 아니다. 고통에 공감하고, 함께 살아갈 방법을 모색할 수 있는 존재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싸움이 아니라, 더 많은 이해와 인도다. 사춘기의 뇌처럼 아직 변화 중인 사회는, 이끌어야 할 시기지 버려야 할 대상이 아니다. 우리의 아들들, 우리의 딸들이 서로의 머리 위에 쥐가 아닌 손을 얹어줄 수 있는 사회. 그것이 우리가 진짜 만들어야 할 요리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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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발가락

침대 위에 놓인 아이의 발가락이 까딱까딱 움직이는 걸 본 날이에요.

그 발가락에서 감정이 느껴졌어요. ‘지금 행복해하고 있구나.’

행복한 발가락을 포착한 순간들을 글로 씁니다.

마음먹으면 언제든 발가락을 까닥거릴 수 있는 어른이 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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