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해버린 평등에게
현대 사회의 이동성, 한 군데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새로운 직업, 새로운 관계, 심지어는 새로운 환상을 찾아다니는 21세기의 방랑 생활이 사람들을 우울하게 만든다.
p.601 <한낮의 우울>
새벽 시간. 아이를 보내려면 1시간 정도 시간 여유가 있었다. 내 눈에는 아직 아기 같기만 한 두 아이를 바라보며 헤 벌어진 입을 살짝 다물어 주고 이불도 다시 덮어주고. 커피 한 잔 내려서 <한낮의 우울>을 펼쳤다. 다음 주 월요일에 연재하기로 한 나와의 약속을 지키려면 다시 읽는 작업이 필요했다. 그러다 600페이지에서 위에 발췌한 문구가 유독 눈에 걸렸다. 돌부리에 발이라도 걸린 듯 얼얼하게 통증이 일었다. 발췌문구 뒤는 이런 내용이 이어진다.
짧은 기간 동안 무려 다섯 번이나 이사를 했던 한 소년이 뒤뜰 떡갈나무에 목을 매 자살하면서 그 나무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유서를 꽂아 놓았다고 한다. “여기서 뿌리가 있는 건 이 나무뿐이다.”
‘끊임없는 분열상태’라고 표현되는 위의 일화에서 나는 6장의 수시카드 논술, 서류, 면접, 교과성적, 수능최저 그리고 수능 언뜻 보면 폭넓은 선택처럼 보이는 것들의 나열을 떠올렸다. 아이는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평등’이라 이름 붙인 강압적인 선택의 기로에서 현기증을 느낀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는 늘 있다. 나눠진 카드에서 기회를 발견하고 그것을 잘 낚아채는 어찌 보면 도박과 닮은. 그러나 대부분의 아이들은 선택 앞에서 기쁘고 설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괴물에게 물리면 덜 아플까?’하는 심정으로 선택을 한다.
‘선택의 자유’와 ‘기회의 균등’ 그리고 ‘평등’이 낳은 것은 불평등이다. 한국사회는 ‘유례없이 평등한 사회’이기에 구조적인 불평등 속에서도 평등을 외치며 치열한 경쟁 구도속에 자기 자신을, 자식을 내몬다. 시험판은 공정성을 내세우며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있어 학생들은 늘 새로운 룰을 따라가야만 한다. 아이들은 어디에 뿌리내릴지 모르는 바닥 없는 세상(바닥을 만들어주고 싶어서 밑줄을 그어봅니다)에서 살고 있다.
산업화를 거치며 서서히 혹은 급격하게 내재화된 '평등'의 그림자는 아직 걷히지 않았다. 법과 제도 속에서 우리는 모두 동일한 기회를 가진 것처럼 말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서울 강남의 한 학생과 시골의 한 학생이 같은 수능 시험을 치른다고 해도, 학원 접근성과 과외 경험의 차이는 성적 격차로 이어진다. 부모의 인맥과 경제적 자원이 직장 채용 기회에 영향을 미치는가 하면, 지역별 편차로 인해 주거와 복지 혜택마저 달라진다.
이런 '형식적 평등' 속에서 지역, 성별, 계층의 벽은 여전히 견고하다. 때로는 정치적 수사로, 때로는 상품화된 서비스로 이용되다가 결국 평등이라는 단어 자체가 평가절하된다. 평등은 법의 장치와 선언으로는 존재하지만 삶의 현실에서는 공허하게 메아리칠 뿐이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선택의 폭이 지나치게 넓은 사회는 집단적인 불안감을 낳게 된다.
1년에 평균 마흔 개 나라를 출장과 화상회의로 오가는 다국적 기업의 임원들, 자신이 속한 스타트업이 대기업, 사모펀드, 해외 투자자 사이에서 잇따라 매각되며 몇 달마다 소속과 업무가 바뀌는 IT엔지니어들, 오늘도 앱으로 식료품을 주문하면서 오래지 않은 과거에 슈퍼마켓 주인과 안면을 트고 안부를 나누던 시절이 기억나지 않는 것이다. 2010년만 해도 스마트폰 앱 마켓에 등록된 앱은 약 30만 개였고, 많은 사람들은 그중 자주 쓰는 몇 개의 앱 기능을 익숙하게 사용했다. 그러나 2025년 현재 앱스토어에는 수백만 개의 앱이 등록되어 있으며 하루에도 수천 개의 새로운 서비스가 출시된다. 스트리밍 플랫폼에 접속해도 영화와 드라마, 유튜브 채널, 숏폼이 끝없이 쏟아지고, 어디에 살고 무슨 일을 하고 무엇을 사고 누구와 결혼할 것인가 하는 것조차 불확실성의 바다에 발을 들이는 일이 되었다. 선택 범위가 넓어진다는 것은 편리하다기보다 때때로 사람을 현기증 나게 한다.
인간의 뇌는 진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또 어떤 이는 우울이 진화의 산물이라 말하기도 한다. 동물 집단에서 패배한 개체의 우울은 잠시 동안 무리를 교란하지 않기 위해 혹은 불필요한 재경쟁을 피하기 위해 작동하는 ‘자연의 완충장치’였다. 그러나 현대 한국 사회에서 이 기제가 작동하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 패배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되는 시험과 평가 속에서 상시적 패배감’으로 바뀐다. 승자는 잠시 승리를 맛보다가 곧 더 큰 경쟁에 내던져지고 패자는 회복의 시간을 갖기도 전에 새로운 경쟁의 링에 서야 한다.
그 결과, 우울은 자연스럽게 해소되는 기능을 잃고 만성화된다. 우울이 더 이상 회복을 위한 쉼이 아니라 사회 구조 속에 내장된 기본 상태가 된 것이다. 한국 사회의 교육, 채용, 부동산 심지어 취미 생활까지도 랭킹과 비교를 전제로 한다. 아이에서 노인까지 모두 발가락 한 개쯤은 우울의 늪에 담그고 살아간다. 차이는 그 늪에 얼마나 깊이 잠겨 있는가뿐이다.
문제는 이런 구조 속에서는 승자조차 패배자의 뇌 구조로 살아간다는 점이다. 다음 경쟁에서 밀릴 수 있다는 두려움, 순위가 떨어질 수 있다는 불안이 뇌를 계속 경계 상태로 유지시킨다. 그 상태는 피로와 무기력을 낳고 결국 모두가 패자처럼 살아가는 사회가 된다
어릴 적 내게 평등은 햇살처럼 빛나는 단어였다. 누구에게나 고르게 스며 가난한 집 울타리에, 성적표 끝자락에, 마음속 가장 어두운 방에도 빛을 들이는 그런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지금의 평등은 판도라의 상자 같기만 하다. 누군가는 안에서 나온 뭔가를 발판 삼아 더 높이 뛰어오르고 누군가는 알 수 없는 것에 쫓겨 방향을 잃은 채 제자리만 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발목까지 차오른 우울에 잠겨 한 걸음을 떼는 일조차 버겁다.
우리가 과거에 인식하던 평등은 이제 완전히 다른 얼굴이 되어버렸다. 그 얼굴은 더 이상 따뜻하고 부드럽지 않다. 때로는 경쟁을 부추기는 심판의 얼굴이고, 때로는 탈락자를 기록하는 냉정한 서기의 얼굴이다. 평등이 진정한 힘을 되찾으려면 그 얼굴을 다시 그려야 한다. ‘모두에게 똑같이 나누어 주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서 있는 자리와 가진 조건을 이해하고 그에 맞게 다가가는 세심함이 필요하다. 형식적 평등이 아닌 실질적 평등, 동일한 규칙이 아닌 공정한 기회, 동일한 높이의 문턱이 아닌 각자의 걸음을 고려한 문턱이어야 한다. 그 인식의 전환은 법과 제도보다 먼저 한 사람 한 사람의 시선 속에서 시작된다. 나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경쟁에서 밀린 이를 어떻게 대하는지 그 작은 눈빛의 변화가 모여 사회의 풍경을 바꾼다. 평등은 제도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살아 숨 쉬는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한 발가락
침대 위에 놓인 아이의 발가락이 까딱까딱 움직이는 걸 본 날이에요.
그 발가락에서 감정이 느껴졌어요. ‘지금 행복해하고 있구나.’
행복한 발가락을 포착한 순간들을 글로 씁니다.
마음먹으면 언제든 발가락을 까닥거릴 수 있는 어른이 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