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은 없다고
바야흐로 동동이 중3꼬맹이시절. 다방면에 호기심이 활개 치던 나로 인해 아이의 뇌는 생명의 신비함으로 절여지게 되었고, 그렇게 진로는 생명과학으로 정해졌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에 동아리도 생명과학, 독서활동도 과학도서 일색, 2학년 선택과목도 이과로 설정한다. 간신히 잡고 있던 멘털은 어째 마법천자문 같기만 한 화학에서 고꾸라지더니 여간해서 회복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동동이의 오락가락 정신상황은 문과생을 이과생으로 만들어버린 나의 만행 때문인지도 모른다.
고3 동동이 전공을 재설정하기도 전에 죽도 밥도 아닌 과탐 성적으로 인해 점수대가 정해주신 과에 자신을 욱여넣어야 하는 상황이다. 수능 점수는 신의 영역이고 학과는 점수대가 정해주시기로 했으니 이제 고민은 해결인 건가. 좌로 갔다 우로 간 생기부는 저 높은 곳에 계신 입학사정관 마마님들이 “어우씨 헷갈려.” 하고 집어던지지 않으면 감사할 지경. 방학 동안 글빨로 장원급제해도 생기부의 합불은 어찌 될지 알 수가 없다. 이리 헛소리를 늘어놓는 이유는 이게 도대체 뭐 하는 짓인가 싶어서다. 이쯤 되면 고3생들은 인간이 아니라 수험용 포켓몬이다. 쓰임새는 대학별로 다르다.
동동이가 내게 전해준 담임쌤과의 입시상담 분위기는 잘 절여진 포기김치였다. 어떻게 해서든 대학을 보내야 하는 선생님과 희망 대학의 끈을 놓고 싶지 않은 학생과의 대화는 잘 풀릴 수 없었다. 많은 학생을 상담해야 하는 선생님에게 아이의 기분까지 들여다봐주길 바라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절망으로 절여져 집으로 돌아온 동동이.
가고 싶은 대학의 가장 낮은 과라도 한번 넣어보자는 말에도 대답 없이 눈물만 뚝뚝 떨구었다.
사실 누가 등을 떠미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방향을 전환한다고 해서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의 시선을 다 맞추려다 결국 나귀를 둘러메게 되는 꼴이 문제라면 문제.
옛 우화처럼 처음에는 “왜 나귀를 타지 않느냐”는 사람들의 말에 올라타고, 또 “왜 혼자 타느냐”는 말에 내려주고, 결국 “불쌍한 나귀”라는 비난에 사람이 나귀를 들어버리는 일은 피해야 한다. 방향 전환 자체가 잘못이 아니듯 나의 선택도 잘못일 수 없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만족시키려는 선택이 아니라 나 스스로의 기준과 목표에 따른 선택이라면 그것은 옳다.
단 명확한 계획이 있고 실무 경험을 쌓을 방법이 있으며 나를 지지해 줄 네트워크가 있다면이란 전제가 붙는다. 하지만 이것은 사회에서 구르고 닳은 성인에게도 결코 쉽지 않은 문제다. 하물며 부모의 울타리 안에서 공부 외에는 이렇다 할 경험이 없는 열아홉 살이 감당하기에는 훨씬 어려운 과제임은 분명하다.
명확한 계획이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조타한다는 의미다. 실무 경험은 말 그대로 현장에서 땀을 흘리며 익히는 기술과 감각을 뜻한다. 네트워크란 나를 지지하고 인정해 줄 인적 자원, 즉 내가 새로운 길에서 버틸 수 있는 관계의 안정망이다.
그렇다면 방향을 조금 바꿔서 “만약 나라면?” 하고 상상해 보자. (지금 읽고 계신 분들도 자신의 현재 상황을 열아홉에 대입시켜 보시길) 내가 열아홉에 대학을 가지 않고 요가 강사의 길을 택한다면? 먼저 요가를 수련할 곳을 찾고, 꾸준히 수련하며 강사 과정을 밟을 것이다. 동시에 원광디지털대학이나 관련 교육기관에서 요가의 이론적 기반을 공부해 깊이를 더한다. 강사 자격증을 취득한 뒤 바로 구직에 나서 일을 시작한다. 그와 병행해 SNS를 통해 퍼스널 브랜딩을 하고 인지도를 쌓으며 관련 도서를 통해 자기 공부를 지속한다. 이런 식으로 구체적인 로드맵을 세워야만 대학에 가지 않더라도 자신의 길을 주도적으로 만들어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튼 동동이의 인생이 내 인생일 수는 없다.
노매가리 고3생의 현명한 마무리를 위해 부모가 해줄 수 있는 일이란?
사실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실천해 왔다. (요즘 정서적 허기가 심합니다. 잘난 척 좀 할게욧!!)
나도 알고 모두 알고 있는 사실 하나. 대학에 붙는다고 인생이 수직상승하거나 얼굴이 카피바라에서 사람이 되는 기가 막힌 반전은 없다는 것.
내가 불안하면 아이는 더 불안하다. 부모가 얼굴에 ‘폭망’이라고 글씨를 쓰고 다니면 아이의 불안은 우울이 된다. 학원 하나 더 넣는 것보다 중요한 건 하루 단 몇 분이라도 눈을 마주치고 대화하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칭찬이어도 상관없다. “너는 오늘 세상을 구했다” 수준의 칭찬이라도 상관없다. 아이들은 내용보다 “엄마 혹은 아빠가 내 편이구나”라는 마음을 알아차린다. 혹시나 대학에 떨어지더라도 “부모가 나에게 실망할 거야.”라고 자책하지 않게 된다. 다만 운이 나빴다고 여기고 다음 스텝을 자연스레 밟게 된다. 부모는 아이의 회복탄력성의 기반이다. 스프링도 저 혼자 튀어 오르면 어느 순간 데굴데굴 구르게 되고 홀로 설 수 없다. 스프링을 붙잡는 것은 결국 부모이다. 수험생에게 중요한 체력, 생활습관, 멘털은 모두 여기서 나온다.
아이가 엉뚱한 말을 해도 생각이 나와 달라도 끝까지 믿어주는 것은 부모의 의무이다. 결국은 아이가 나보다 먼저 깨닫게 된다. 나를 포함하여 부모가 되면 가장 하기 힘든 것이 나라는 필터를 걷어내고 온전한 사람으로 아이를 바라보는 일이다. 서로 간에 시행착오를 겪으며 놓아줄 수 있다면 좋지만 대부분은 아이가 훌쩍 큰 후에도 애증의 관계로 서로를 붙들고 있는 경우는 매우 흔하다. 내 아이를 독립된 존재로 인정한다는 것은 아이가 내 기대와 다르게 행동할 자유를 허락하는 것이다.
비교는 부모가 할 수 있는 선택 중 가장 어리석은 짓이다. 나는 첫째와 둘째를 구분하지 않고 키웠다. 비교라는 것은 아이들을 분석하고 평가하고 서열화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은 대우의 차이를 만들고, 그 차이는 결국 아이에게 차별로 다가올 수 있다.
대화 속에서 ‘첫째니깐’, ‘둘째니까’라는 말은 아예 쓰지 않았다. 특히 ‘장녀’, ‘막내’ 같은 단어는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대신 서로 잘하는 것을 이용해 서로를 돕게 했다. 큰 아이가 학업을 잘하면 그 능력으로 작은 아이를 도와주게 하고, 작은아이가 손이 야무지고 센스가 있어 요리와 정리를 잘하면 그 능력을 발휘해 누나를 챙기게 했다. ‘너는 첫째니까 참아야 해’ 같은 역할을 강요하는 대신 각자의 장점을 살려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관계를 만든 것이다. 그 결과 두 아이는 구분과 경계 없이 함께 성장했고, 사이가 무척 돈독해졌다. 두 아이는 남매이기도 하지만 상호존중하는 관계인 것이다. 비교는 물건 고를 때나 하자.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괜찮다.”는 말 한마디이다. 사실 이 말은 너무 흔해 빠졌다는 단점 외에도 부작용이 있다. 계속 말하다 보면 아이가 부모를 은근히 시험한다.
“이번에도 괜찮다고 할까?”
신기한 것은 ‘괜찮다’가 쌓이면 쌓일수록 아이는 부모를 만만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내 편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는 사실이다.(어쨌거나 예외는 존재한다)
뻔한 것들이 뻔한 이유는 그 유들유들함 때문이다. 어떻게 흔들어도 돌아오는 기가 막힌 뻔뻔함. 동동이 인생 1막은 조금 느리고 서툴고 힘들어도 괜찮다. 인생 2막도 조금 느리고 서툴고 힘들어도 괜찮다. 인생 3막도…… 결국 다 괜찮다. 우리 모두 그렇게 살고 있다.
행복한 발가락
침대 위에 놓인 아이의 발가락이 까딱까딱 움직이는 걸 본 날이에요.
그 발가락에서 감정이 느껴졌어요. ‘지금 행복해하고 있구나.’
행복한 발가락을 포착한 순간들을 글로 씁니다.
마음먹으면 언제든 발가락을 까닥거릴 수 있는 어른이 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