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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같은 부모

권위적인 부모 그리고 인정과 철회

by 요인영



동동이는 부모의 말을 참 잘 들어준다. 산책하는 길에, 침대에 함께 누워 잠들기 전에, 밥을 먹으며, 같이 드라마를 보면서도.


나는 아이가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인 줄 알았다. 그래서 착각을 알아차리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말을 잘 듣는 아이라서 함께 대화를 나누는 관계가 건강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 아이가 말을 듣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냥 삼키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부모가 주는 것이니 좋은 줄 알고 꿀꺽꿀꺽 믿고 삼켰던 것이다. 소화는 커녕 씹지도 못하고 억지로 밀어 넣으며 받아먹고 있었음을. 그 음식이 사실 먹이면 안 되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 걸까.


우리의 말은 대개 부패한 음식물과 다를 바 없다. 신선하고 영양가 있다고 믿는 것은 착각이다. 말에는 불안이 스며 있고 고민은 쉽게 썩어 문드러진다. 아이는 아직 그 부패를 구분할 미각이 없다. 그저 받아들이고 삼킨다. 부모의 고민과 두려움이 아이의 위 속에 고여 곪아간다. 말은 음식이 되지 못한 채 독으로 변한다.


그렇게 아이는 부모의 말로 배부르지만 정작 자라는 데 필요한 영양은 얻지 못한다. 나는 대화를 나눈 줄 알았지만 사실은 혼잣말을 들려준 것뿐이었다. 말이 대화가 되려면 아이가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부모의 입에서 나가는 것들을 단순히 쏟아내는 대신, 어떻게 건네야 할지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 부모는 관계를 다시 세워야 한다. 자식은 친구가 아니다. 특히 청소년기의 자식은 더더욱 그렇다.


파블로 피카소 엄마와 아이.png Mother and Child, 1902 by Pablo Picasso



그렇다면 부모는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청소년은 아직 자기감정과 타인의 감정을 분리해 내는 능력이 미숙한다. 부모가 친구처럼 자신의 고민을 쏟아내면 아이는 그것을 ‘내 탓’으로 받아들이거나 감정적으로 휘말린다. ‘정체성 대 역할 혼란’의 시기인 청소년기에 부모가 친구처럼 의지하면, 아이는 “나는 자식이면서 동시에 부모의 친구 역할까지 해야 돼?" 혹은 “이 문제 내가 해결해야 하는 거야?”하는 혼란에 빠질 수 있다.


친구 관계는 대등성과 상호성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부모-자녀 관계는 본질적으로 돌봄의 비대칭성이 존재한다. 부모가 아이에게 친구처럼 대하기 시작하면 돌봄의 무게가 아이에게 전가된다. 건강한 관계를 위해 ‘경계’가 중요하다. 부모가 친구처럼 아이와 경계를 허물면, 아이는 자신의 경계를 세울 기회를 잃게 된다.


부모가 고민을 털어놓으면 아이는 그것을 해결할 능력이 없음에도 해결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이는 아이에게 불필요한 죄책감과 불안을 안겨준다. 친구는 선택할 수 있지만 부모는 선택할 수 없는 관계이다. 친구는 관계가 틀어지면 멀어질 수 있지만 부모는 그럴 수 없다.


그렇다면 부모는 아이를 어찌 대해야 하는 걸까. 아이를 친구처럼 세우는 대신, 아이가 자기 자리에서 자라날 수 있도록 경계를 지켜주어야 한다. 대등한 대화가 아니라 아이의 마음을 안전하게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 되어주어야 한다. 부모의 말은 나누는 것이 아니라 건네는 것이어야 하고, 그 말은 아이가 소화할 수 있을 만큼만 또 스스로의 속도로 삼킬 수 있을 만큼만 다정해야 한다.


아이를 친구라 부르며 가까이하려는 마음은 따뜻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함정이 숨어 있다. 부모가 친구라며 자신의 불안을 쏟아내면, 아이는 그것을 감당할 능력이 없음에도 짊어져야 한다는 착각에 빠진다. 아이는 부모의 빈자리를 메우느라 자기 세계를 넓혀갈 기회를 잃고, 또래 속에서 키워야 할 사회적 감각을 놓치게 된다. 친구는 서로의 짐을 나누지만, 부모는 아이에게 짐을 나누어서는 안 된다. 부모는 아이가 짊어질 수 없는 무게를 거둬내 주는 존재여야 한다.





권위와 권위주의를 구분하지 못하는 부모는 어떤가.


내가 어릴 때 주로 들었던 단어들은 고집불통, 말 안 듣는 아이, 폭력적 기타 등등. 지금 생각하면 내가 이런 말을 들을 만큼 못된 아이었나 싶기도 하다. 칭찬받았던 기억, 좋은 기억들은 희미하고 왜 이런 것들만 남아 있는가 싶어 씁쓸하기도 하다.


이 글을 쓰며 나의 부모는 권위주의적인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권위주의는 권위와 다른 개념이다. 아이의 의견을 듣지 않고 “내가 부모니까 무조건 따라야 해.”하는 강요, 대화가 명령과 복종으로만 흘러가며, 나 같은 아이는 반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 것. 당시 부모의 존재는 내게 억압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권위 ‘authority’는 ‘augere’. '늘리다, 성장시키다, 키우다'라는 동사에서 왔다. 이 말은 무언가를 자라게 하고 확장시키는 힘을 뜻한다. 한자의 ‘權威’는 '힘과 위엄으로 영향을 주는 힘'을 뜻한다.


권위란 억누르는 힘이 아니라 '자라게 하는 힘'이다. 씨앗은 심어놓고 흙을 눌러 짓밟는다고 싹이 튀어나오지는 않는다. 햇빛과 바람, 물과 흙이 제 몫을 다할 때 비로소 어린싹은 자기 힘으로 뿌리를 내린다. 부모의 권위도 그와 같다. 아이 위에 군림하는 위엄이 아니라 아이 곁에서 자라나도록 지켜주는 힘이다.


나는 오래도록 부모의 말에 눌려 살았고, 그 말이 때로는 부패한 음식처럼 나를 괴롭혔다. 그러나 이제야 안다. 아이가 삼킬 수 있는 말은 억지로 먹이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의 입맛으로 받아들이는 말이다. 아이의 세계는 친구처럼 가볍게 나누는 관계 속에서 자라지 않는다. 무거운 짐을 덜어내주는 부모의 권위 속에서 아이는 자기 길을 걸어갈 용기를 얻는다.


따뜻한 경계, 다정한 권위, 그리고 물러설 줄 아는 철회, 부모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음식은 이것뿐이다. 아이는 그것을 천천히 씹어 삼키며 자라날 것이다. 부모의 말을 모조건 삼키는 아이가 아니라, 부모의 말을 자기 것으로 소화해 내는 아이로, 그때 비로소 말은 음식이 아니라 성장이 된다.
















에릭 에릭슨 <유년기와 사회>, 아들러 심리학에 기반합니다.

에세이 표지 작품: 말린&에밀, 콜린 로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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