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딸을 소개합니다
저는 친구와 한날한시에 요가를 시작했어요. 이 몸 변치 말자 땀으로서 맹세했지요. 똑같이 먹고 똑같이 운동하는데, 그 친구는 라인이 달라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어요. 저는 폼룰러만도 못한 신세가 되어 사바아사나로 슬픔을 달래야 했지요. 세상이 공평하지 않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근육과 대사량도 그러하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순간 저는 세상이 텅 빈 것이 나가르주나 선생께서 말씀하신 '공이 바로 이것이구나' 하고 온몸으로 깨달았지요. 그 친구는 몸을 얻고 저는 깨달음을 얻었으니 세상은 공평하지 않으냐 하신다면 그럼 너도 몸 말고 깨달음을 얻을래? 하고 싶네요.
오늘도 가렵지 않은 성대를 긁어가며 호흡에 빠져있는데 문득 제 매트 옆으로 ‘인류가 진화한다면 바로 저 거지’ 하는 형태가 정답처럼 다가왔어요.
흔히 부부간의 논쟁은 다짜고짜 시작되곤 한답니다.
후방경사인 신인류가 나은가 전방경사인 그냥 사람이 나은가를 두고 격한 논쟁이 벌어졌지요. 서로 각자에게 유리한 동작을 선보이며 못볼꼴을 시연하는 사이 오징어와 주꾸미가 서로 우열을 가리는 모양새를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었던지 따님이 등판합니다. 상황은 급하게 정리되었어요.
“그러니까 부부인 거야. 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 살라고.”
뭔가 소름 끼치게 맞는 말을 하며 웃더군요. 불현듯 “차라리 자웅동체가 낫겠어. 합친 것이 낫잖어.” 이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저는 커다랗고 슬픈 진실하나를 간과하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합쳐 만든 존재가 따님이라는 사실을요. 별명이 거북이고 애칭이 동동이인 현생인류는 옆에서 보면 아찔한 실루엣으로 놀라고 뒤에서 보면 어딘지 애달픈 형상을 하고 있었으니 오늘의 논쟁은 불문에 부치도록 하겠어요. 아직은 성체가 아니니 희망을 가져보며. 그래도 후방경사는 등짝을 패면 윽! 하면서 잠시 자세가 교정되는 효과가 있어요. 저 요가강사 맞습니다.
소개를 위한 갑작스러운 스무고개
아이도 어른도 아닙니다.
어느 것 하나 섣불리 결정할 수 없고 결정 후 번복이 어렵습니다.
어렵게 손에 쥔 후에도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입니다.
그 한 번의 결정이 살아가는 내내 영향을 미칩니다.
외줄 타기 같은 폭이 좁은 낭떠러지 같은 길을 걸은 후에도 길은 좀처럼 넓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저것 가득 든 등짐을 내려놓아도 빈 손일 수 있습니다.
도착한 후에도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만들고 다시 해보면 좀 더 낫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듭니다.
선택 후 이미 막혀버린 터널의 출구는 입구와 조금도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한 발 걸어 둘러본 그곳은 온갖 상반되는 감정이 공존하는 곳입니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아이도 어른도 아닌 동동이는 어디쯤 와 있을까요? 5월 다 지나 고3 터널의 중간쯤 와 있습니다.
더 힘든 상황도 다른 상황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도 다른 상황, 더 힘든 상황에서 성장해 왔으니까요. 그럼에도 이 주제로 글을 쓰고 싶은 이유는 이 희한하게 굴러가는 상황을 이 뭔가 대단히 잘못되었지만 당장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을 헤쳐나가야 하는 아이의 심정을 함께 하고 싶어서입니다.또 함께 성장하고 싶어서입니다.
행복한 발가락
침대 위에 놓인 아이의 발가락이 까딱까딱 움직이는 걸 본 날이에요.
그 발가락에서 감정이 느껴졌어요. ‘지금 행복해하고 있구나.’
행복한 발가락을 포착한 순간들을 글로 씁니다.
마음먹으면 언제든 발가락을 까닥거릴 수 있는 어른이 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