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로 인해 내가 더 성장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특히 어떤 말을 뱉고 아이의 눈과 표정을 본 후 뜻밖의 감정을 기록하는 시간, 곱씹는 시간이 내겐 그랬다. 특히 폭력의 관점에서 그렇다. 흔히 폭력은 눈에 선명히 드러나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한다.
습관이나 목적을 위해 아이가 고집하던 방향이 바뀔 때, 아이가 가려는 방향이 실패할 것을 예상해 발도 딛지 못하게 설득하고 내가 만들어 놓은 기준과 논리에 아이를 가둘 때 그 안에서 아이의 다른 생각은 조용히 힘을 잃는다. 제멋대로 자라나던 생각은 아이의 성향에 따라 사라지기도 다른 방향으로 강화되기도 한다. 아이의 ‘나’가 흐르지 못하고 자극되어 강화되면 그것은 ‘상처’로 남는다.
걱정이라는 이름의 족쇄에 아이를 가둔다는 것. ‘걱정하는 마음’이 문제는 아니다. ‘걱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문제인 것이다. 마음이 내 마음 안에 머물다 사라질 때 그것은 상대를 위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흔히 걱정은 이런 식으로 표현된다. “너는 왜 엄마를 걱정시키니?” 사랑의 표현인 것처럼 걱정을 행사한다. 걱정은 내 안에서 발생하는 아이에 대한 기대와 우려의 다른 방식이다. 걱정을 덜컥 내려놓은 자리에 부모의 걱정과 화를 두려워하는 아이가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걱정을 한시름 덜고 싶은 ‘내 걱정을 걱정하는 나’가 있다면 이것은 폭력이다.
걱정하는 마음이 머문 자리에 고여 있던 흔적은 아이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설득하지만, 걱정의 말들을 두서없이 쏟아 낸 자리에는 상처가 남는다.
가까이에 있지만 멀리서 사랑한다.
날개깃은 드리우지만 막 자라나기 시작한 아이의 연약하고 성긴 깃털에 닿지는 않는다. 청소년기는 부모와 닿고 싶으면서도 닿지 않기를 원하는 까다로운 시기이다. 부모는 아이와 시소를 타고 있다. 자꾸자꾸 내쪽으로 기우는 무게를 조절하여 최대한 티 나지 않게 아이 쪽으로 무게를 실어줄 수 있는 균형감을 갖고 있어야 한다.
아이는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것처럼 인정에 주려있기도 하다. 날다가 수도 없이 떨어진다. 무엇이 문제인지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잘 모른다. 그러면서 높이 나는 새라도 된 듯 자존심만 하늘을 찌른다. 충분하지 않은 인풋에도 출력이 가능한 프린터이기도 하다. 치기 어린 그 행동과 말은 청소년기가 아니면 할 수 없다. 나는 그런 행동과 말을 낭만이라 부른다. 어찌 이런 존재에게 화를 낼 수 있나. 내 시선으로 물을 들이나.
나로 물들이지 말고 세상의 물이 들게 놓아둔다.
이보다 더 가까울 순 없지만 부모는 아이에게 ‘타자’ 일 수밖에 없다. 아이가 내 안에 있을 때, 이 경험은 세상에 둘도 없는 경이의 순간이었다. 경이의 순간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연장하고 싶은 것. 그러나 몸 밖으로 배출된 순간 자식은 이미 타자이며 '당신과 나는 다른 존재'임을 찢어질 듯한 울음으로 경고한다. 부모는 이것을 먼저 알고 느껴야 함에도 대부분의 경우 자식이 먼저 깨닫는다. 눈에 콩깍지가 씐 채로 자식을 맹목적으로 바란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사랑을 주고받길 원하지만 이미 다름을 깨달은 자식은 부모와의 단절을 꿈꾼다. 경계성의 폭력은 자식이 내가 아님을 그래서 내 뜻대로 되는 존재가 아님을 알지 못하는데서 발생하는 착각의 산물이다.
자식이 어려운 것은 전언철회의 형태를 띠기 때문이다.
아이의 물음과 요구는 늘 취소선이 붙은 형태로 부모에게 답을 요구한다.
언제든 취소할 준비가 된 아이에게 부모는 확고한 정답을 주었다고 생각하지만
아이에게 부모의 답은 늘 오답일 수밖에 없다.
자식은 나의 일부였던 적이 있는 유일하면서 특별한 타자이다. 이 특별한 손님을 잘 대접하려면 나는 여러의미로 ‘깨어 있는 나’가 되어야만 한다.
부모가 깨어 있지 못하면 자식은 필연적으로 상처 입는다.
간격을 유지하고
벗겨지지 않는 콩깍지는 내버려 두고 내면의 시력을 높이는 것.
내 인생의 둘도 없을 손님을 잘 배웅하는 일
아이의 얼굴에서 발견한 뜻밖의 감정은 내게 이런 생각을 남겼다.
행복한 발가락 첫번째 이야기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