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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보다 존재

by 요인영



요가를 처음 시작한 날.

제 발로 걸어왔는데도 달랑 들어 올려져 매트 위에 덩그러니 놓인 기분이었다. 도착했음에도 먼 길을 곧 떠나야만 할 것 같아 편안하게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기대는 짓궂게도 불안의 얼굴로 나타나기도 한다. 친절한 요가선생님의 안내에도 불구하고 낯선 것들이 주던 서늘한 감각을 기억한다. 뭣도 모르면서 잘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배우러 왔음에도 마치 뭔가를 증명하고 보여줘야 하는 듯 잔뜩 도사리고 있었다. 우습게도 요가원에서 승부욕이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닫게 된 날이기도 하다.


2012년 요가를 처음 시작했을 때의 기록을 보면 몸과 마음의 변화에 대한 긍정적 피드백 그리고 요가에 대한애정이 느껴진다.


"35년 동안 걷기 말고는 이렇다 할 움직임 없이 살았던 몸은 사흘이 지나자 변화하기 시작했다. 믿기지 않았지만 변화는 어떤 일정한 주기를 갖고 찾아오기도 하고 급작스레 나타나기도 해 그 기쁨은 요가를 계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가장 놀라운 것은 하루거리로 아파 기분까지 추락시키던 두통이 사라진 순간이었다. 아프지 않다는 것을 믿을 수 없어 한 달가량을 조바심 내며 두통을 기다렸던 것 같기도 하다. 고질적이었던 어깨통증이 사라지고, 마른 체형이지만 마른 비만에 가까웠던 몸은 누군가 잡아당기기라도 한 듯 리프팅 효과가 나타났다. 출산 후 늘어졌던 하복부와 엉덩이는 몰라보게 올라붙었다. 늘어나면서 생긴 흔적까지는 어찌할수 없었지만 늘 힘이 없어 빌빌대던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매일 같은 시간 다양한 아사나로 깎고, 다듬고, 늘리고, 버틴 몸은 새로운 자극으로 인한 통증이 늘 있었다. 자극은 한편으론 나른했고, 몸살과 함께 출몰하여 온몸을 난타했다. 그러다 보상처럼 몸의 변화라는 선물을 놓고 갔다.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가벼움.

누군가 구겨놓고 간 종이 같았던, 아무렇게나 쓰인 낙서 같던 몸이 비록 구겨진 부분이 새것처럼 복원되진 않지만 낙서가 완벽하게 지워져 새 장이 될 순 없지만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빈 곳은 채워지고 넘치는 곳은 버려졌다."



초심자의 행운은 처음 시작하는 사람이면 그게 누구이건 찾아오는 공평한 기회이다. 처음의 마음, 열림, 겸손, 신선함이 결합되어 만드는 몰입도 최상의 상태. 선입견과 고정관념이 없고, 긴장감 때문에 높은 집중력을 유지하며, 실패에도 유연하고 결과에 상대적으로 덜 집착한다. 다양한 출발점에서 집중하던 내 모습이 생각나는 이유는 그때의 내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까닭이다.


어떤 일이건 알면 알수록 쉬워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어려워진다. 숙련될수록 정밀해지고 정밀해지면 완벽을 꿈꾼다. 몸도 마찬가지이다. 안전하게 몸을 쓰는 방법은 자기 자신의 한계를 알고 몰아붙이지 말아야 함인데 그것은 극복과 도전이라는 이름으로 곧잘 무시된다.


숙련자이면서 강사라는 이름표까지 달고 나니 어쩐지 더 빈곤하게 느껴진다. 수련을 하는 요가원에서 강사자격증을 받게 되면 회원으로 있을 때처럼 맘 편히 수련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강사와 회원의 그 중간 어느 지점에서 나를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내가 내리는 판단과 평가에서 낙제하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하게 되는 것이다. 같은 요가원에서 수련과 강사를 동시에 할 경우 장점과 단점이 동시에 존재하는데, 장점은 강사의 부재 시 바로 투입될 수 있다는 점이고, 단점은 매일 같이 수련하며 웃고 떠들다가 갑자기 그들을 마주 보고 수련을 이끌어야 한다는 점이다.


'타인은 생각보다 당신에게 관심이 없다.', '잘 가르치면 누구도 신경 안 쓴다.' 등의 말이 힘이 되지 않는 이유는 준비되지 않으면 한 발짝도 떼지 못하는 완벽주의 때문이다.



요가 ttc과정 두 번째 시간은 상칼파(Sankalpa)의 시간이었다.


칼파(Kalpa): 맹세, 산(San): 가장 높은 진실에 연결됨/가슴에서 태어난





상칼파(sankalpa)의 행위는 당신이 가장 깊이 원하는 것을 향해 움직이도록 돕는 맹세를 하는 것이다. 먼저, 의도를 정해야 한다. 결과보다 의도가 더 중요하다. 상칼파는 행동하라는 부름이다. 우리를 부르는 소리를 듣지 않는 게 더 쉽고, 길을 바꾸지 않는 것이 더 편하다. 상칼파는 내면의 메시지를 듣는 것이며, 사랑으로 그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인요가의 언어/가브리엘 해리스]



의도, 행동, 내면의 메시지와 방향성 그리고 사랑


상칼파에 대한 설명을 읽었을 때 ‘사랑으로 그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라는 표현에 어쩐지 목이 메었다. 의도를 진지하게 여긴 적이 있었던가. 내면을 샅샅이 헤집을 줄만 알지 정작 그 소리에 귀 기울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음을 알게 된 시간이기도 했다. 인생에서 가장 큰 동력이 사랑임에도 그 흔함과 식상함에 그 위대한 힘을 무시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이 시간을 진지하게 임하고 싶었다. 숙련자이면서 강사라는 이름표까지 달고 나니 어쩐지 더 빈곤해지는 기분도 달래주고 싶었다. 자기 자신에게 유독 가혹한 사람이 있다. 내 아픔의 근원은 두려움. 두려움은 나르시시스트이다. 너는 부족하고 그래서 실패할 거라고 속삭이며 그렇게 외부와 나를 끊고,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든다. 항상 무언가를 하고 있음에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은 강력한 동기로 작용하여 제자리를 맴돌게 하다 결국은 몸과 마음을 동시에 망가뜨린다.


타인의 말을 듣듯이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어떤 존재로 살아가고 싶은가?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가?

내가 지금 이 삶에서 회복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내가 진정으로 믿고 싶은 것은?

내가 사랑으로 행동한다면, 어디로 향하게 될까?


배울 때 큰 즐거움을 느끼는 나는 단비를 맞듯 몸도 마음도 활짝 열린다. 그렇게 배운 것들을 나눌 때 비록 주변 사람들이 전부이지만 행복과 충만함을 느낀다. 내가 갖고 있는 자원을 무시하지 않는 것 그리고 그것을 나눌 수 있는 용기.


언제든 도움을 청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도움을 받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나는 아등바등 홀로 뭐든 해결하려고 애써왔다. 손절이 전염병처럼 번지는 사회에서 관계의 확장을 꿈꿔본다면 어떨까.


믿음은 최악의 선택이라고 믿어왔다. 뭔가를 믿는다는 것이 의지박약이 상징인 것처럼 생각해 왔다. 그때마다 나의 앎에 앎을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신뢰할 수 있는 나를 만드는 방법이 그것이라 생각했다. 눈을 번뜩이며 내 앞의 것을 볼 수 있다면 마치 세상을 소유할 수 있다는 착각은 좀처럼 깨기 힘들었다.


무한으로 나를 채우던 것을 그만두고 외부로 시선을 돌려 느슨하게 느긋하게 풀어놓는 삶은 어떤가. 타인의 도움을 받아들이는 것을 선택이 아니라 능력으로 인식한다면 기존에 나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 되어 있을 것이

다.


그러므로 소유보다는 존재를 추구하는 삶.





아무것도 미리 준비하지 않고 어떤 방식으로든지 자신을 무장하지 않은 채 사태에 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그 대신에 자발적으로, 그리고 생산적으로 반응한다. 그들은 자기 자신에 관해서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지위에 관해서도 잊어버린다. 그들은 자아에 방해를 받지 않는다. 그들이 상대방의 인물과 그 인물의 생각에 충실하게 반응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들은 새로운 관념을 만들어내는데, 그들은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생산해서 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소유형의 사람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에 의존하는 반면, 존재형의 사람들은 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살아 있다는 사실 그리고 억제를 버리고 반응할 용기만 가지면 어떤 새로운 것이 탄생하리라는 사실에 의존한다. 그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불안한 걱정 때문에 자기를 괴롭히는 일이 없으므로 대화할 때에는 아주 활기를 띤다. 그들의 활기는 전염되기 쉽기 때문에 가끔 상대방이 그 혹은 그녀의 중심성을 초월하는 데 도움이 된다.

[소유냐 존재냐/에리히 프롬]



상칼파의 목적은 그 방향으로 가는 여정에서 겪게 되는 모든 시간, 그 시간 속에서 새롭게 발견하는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일 수 있다.


새로 시작한다는 감각은 완벽주의자인 나에게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은 유일한 순간이었다. '완벽한 것이 없음'을 지식으로 배운 나는 아직 그것을 체화하지 못했다. 도움과 믿음과 느슨함이 완벽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할지 알 수는 없지만 소유보다는 존재가 매일매일을 새로운 시작으로 채울 수 있을지 그것 또한 알 수 없지만 확언과 그 길 위에 뿌려진 사랑의 힘을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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