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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부럽지가 않어

애증의 핸드스탠드

by 요인영



목이 길고 팔이 짧은 나는

시르사아사나(머리서기)를 할 때마다

목에 체중이 실릴 수밖에 없었다.

어깨 힘으로 아무리 밀어낸다 해도

짧은 팔로 밀어내는 것은 한계가 있다.

낑낑대며 밀어내다 목을 삔 게 몇 번이던가.

아쉽지만 그만해야지 싶었다.

시르사가 없는 세상도 그럭저럭 살만했기에.

...그러나 치…치욕…스럽다.

머리서기를 두려워하는 요가강사라니.


요가지도자과정 세 번째 시간, 주제는 핸드스탠드였다.

팔꿈치를 편 상태에서 밀어내는 것이니

해 볼만 하지 않을까?

승부욕이 쨍쨍 내리쬐는 사막 같은 육신에

희망이 퐁퐁 샘솟는 기분이었다.


핸드스탠드를 위한 첫 번째 과정

2인 1조로 짝을 짓는다.

팔로 매트를 짚고 밀어낸 상태에서

한 다리를 골반 높이까지 들어 올린다.

옆에 서 있는 힘세고 유능한 강사의 손바닥 위에

발등을 올리고 냅다 누르면

바닥에 있던 반대쪽 다리가 붕 떠오른다.

이제 무릎을 접어 천장으로 뻗으면 성공!

치골을 당겨 배꼽을 안으로 위로 끌어올리며

코어를 활성화하여 균형점을 찾는다.

홀로서기에는 아직 무리지만 거꾸로 서서

밀어내는 것에는 성공하였으니 절반의 성공인가?




핸드스탠드를 위한 두 번째 과정

이번에도 2인 1조.

런지 자세에서 다리를 뒤로 뻥 차는 힘으로

천장 쪽으로 들어 올린다.

이때 조금 전 힘세고 유능한 강사의 빠르게

낚아채는 기술이 필요하다.

뻥 찬 다리가 맥없이 강사의 손에 쥐어져 있다.

거꾸로 들린 닭이 된 기분이다.

치…치… 욕스럽다.

탈탈탈탈 시동이 꺼지기 일보직전인 어깨가 팔꿈치로

신호를 보낸다.

'조용히 구부러질래 뒤로 꺾여볼래?'

정확히 0.1초 후 매트 위에 고꾸라졌다.

몇 차례를 시도한 것인지

결국은 기운이 빠져 무너졌다.


치욕은

'존재로부터 자기 자신과 손을 끊을 수 없는

무능으로부터 생긴다'라고 레비나스 선생께서 말씀하셨는데,

여러모로 무능을 실감한다.

역시 신은 내게 무엇도 거저 주지 않는다.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손에 쥘 수 없는 팔자라 하였다.


괜찮다. 노력하면 된다는 말이잖어.


'아사나를 할 수 있는 것'과 '그것을 가르치는 것'은 별개라고 하지만 난이도 있는 동작을 하고 하지 못하고는 내 몸의 성적표인 것만 같아 속상한 맘이 드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몸과 함께 뒤집어진 마음은 바로 일어나는 몸과 달리 빠르게 회복하지 못했다.


이럴 때는 '괜찮다'라고 억지를 부리기보다는 핸드스탠드를 하기 전에 했던 사전동작들을 반복해야 한다. 사전 동작들은 알게 모르게 천천히 몸에 쌓인다. 좋지 않은 습관이 몸에 쌓여 체형이 변형되는 것처럼 힘이 많이 들고 버텨야 하는 동작들 바꿔 말하면 멋대가리 없고 재미는 찾으래야 찾을 수가 없는 짜증유발 자세들은 습관의 반대방향으로 작용하여 체형을 변화시키고 힘을 길러준다. 그러다 인생의 쓴맛을 알려 준 아사나가 어느 날 갑자기 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단번에 성공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실패하고 또 실패한다. 단번에 성공하는 사람은 왜 되는지, 왜 안 되는지 그 이유를 모른다. 물론 예외는 있다. 그럼에도 문제점을 빠르게 파악하여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하지만 대부분은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파악하고 하나하나 고쳐가면서 내 몸을 알게 되고 타인의 몸을 이해하고 마음까지 돌보게 되는 것이다.


내가 걷는 길은 분명 그런 길이다. 무엇도 한 번에 되지 않아 매번 지치고 힘들지만 반대로 마음은 단단해지고 이해의 폭은 넓어지는 그런 길.


실패는 어떤 행위에 대한 결과이자 사건이다. 그 발생한 일에 대한 이차적인 감정은 두 번째 화살이다.


붓다는 고통과 괴로움의 차이점을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누군가 화살을 맞았다고 하자. 그 화살은 매우 날카롭고 고통스럽다. 이것이 첫 번째 화살, 즉 피할 수 없는 고통이다. 사람들은 첫 번째 화살에 맞은 뒤, 또 다른 화살을 스스로에게 쏜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지?"

"앞으로 더 아프면 어떡하지?"

"내가 뭘 잘못했지?"

아픔에 더해 두려움, 분노, 집착, 자책으로 괴로워한다.


아픔을 느끼지만, 그것이 '내 것'이란 생각에 집착하지 않는 것. 고통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그 위에 불필요한 생각을 더하지 않는 자세는 매 순간 필요하다.

특히 일이 잘 안 풀릴 때는 더더욱.




오늘은 글을 올리면서 내가 이리도 따분하고 교과서 같은 사람이었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브런치글을 쓸

때, 소설을 쓸 때, 요가 강사로 회원들 앞에서 말할 때의 내가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요. 이 모든 내가 나임에도 마음 챙김과 명상 속에서 나를 바라볼 때, '나를 쓰는 일'과 '나로 사는 일' 사이에 미묘한 어긋남을 느낍니다. 어느 순간엔 내가 나를 흉내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스치기도 해요. 하지만 이 흉내조차, 내게 잘 보이기 위한 애처로운 연기 같아 씁쓸해지기도 합니다. 조심스러운 나를 벗어나기 위해 시작한 일들인데, 더 조심스럽게 행동한다면 이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요?


어긋남도 하나의 리듬일 수 있을까요? 반드시 일치하지 않아도 괜찮다. 생각하면 되는 것인지. 이것도 과정의 일부인가요? 나를 하나로 묶는 일이 아니라 다르게 흔들리는 나를 지켜보는 일도 필요한 것인지 생각해 봅니다.


몸은 어딘가로 나아가고 있는데, 마음은 자꾸 뒤를 돌아봐요. 핸드스탠드 후에 뒤집힌 마음이 바로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요가와 명상을 하면서 몸은 늘 현재에 충실하지만, 그 순간조차 마음은 과거에 붙들려 있습니다. 그러다 오늘은 다른 것을 알아차립니다.




지금 이 자리에 도달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나를 거쳐왔는지를.
미묘한 어긋남 속에 어쩌면 숨 쉴 틈이 있다는 것을.







사진출처: unsplash- marc kl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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