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정렬의 일반해를 원하는 사람

그리고 정렬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by 요인영


장마는 끝났는데 잠이 쏟아진다.

오지 않을 뭔가를 기다리다 지친 사람처럼.

땡볕 아래 장화를 신고 육교 위를 걷던 아이는

이즈음 어김없이 떠오른다.

손가락 하나 들 힘도 없을 만큼 지쳐 잠들면

꿈 속의 아이는 반복해서 우산을 찾곤 한다.


끝난 후에 기다리고

맞지 않는 착장을 하고

필요하지 않은 것을 찾는 일은 일상이다.


미련과 어리석음과 불필요


오늘 명상하면서 떠오른 것들이다.

명상은 생각을 비우는 일이라 알고 있지만

명상은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에게

공간을 내어주는 일이다.

익숙해질 때까지 바라보는 것이다.

매일 하고는 있지만 그만큼 자주 길을 잃는다.


방향 감각이 없는 사람은 내 안에서도 길을 잃는다. 전체를 조망하거나 세부를 기억하는 능력은 애초에 주어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방향이란 결국 중심이 있어야 생기는 것인데, 중심이 없는 사람은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을 보는 것처럼,

모두 진짜 같고

모두 가짜 같다.


어떤 일에 중심을 갖기까지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다. 은근한 실행력을 갖고 있는 나는 무작정 따라 해 본다. 요가를 수련하며 한동안은 이런 과정을 거친다. 요가지도자과정에 참여하며 티칭을 익히는 동안 흉내지빠귀처럼 선생님의 모든 것을 따라 한다. 겉으로는 비슷한 모양을 만들지만 그 소리가 어디서 시작됐는지 알지 못하는 새처럼 흉내에만 열중한다.

요가의 본질보다 그럴듯한 형태를 먼저 익히지만 끝나고 나면

모두 가짜 같다.





요가를 잘 사용하려면 정렬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자세가 무엇을 위한 자세인지 왜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근력은 안 되지만 유연성이 되어 가동범위 이상 넘어갈 때 다치지 않고 안전하게 수련할 수 있다. 입으로 전해지는 정렬은 분명 일반해(모든 사람이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지만 체화되어 다시 입으로 흘러나오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린다.


요가를 가르치다 보면 ‘정렬’이라는 단어에 쉽게 위안을 얻는다. 마치 모든 몸에는 하나의 올바른 방향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처럼.

정렬이 정말 필요한 것인지, 그저 타인의 몸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한 가지의 길인 것은 아닌지 의심해봐야 함에도 처음 요가티칭을 배울 때는 그 정렬만이 정답처럼 느껴진다. 그 기준에 가까울수록 덜 아프고, 더 나은 몸이 만들어진다고 믿게 된다.


정렬은 해답이 아니라 질문이 시작되는 지점이어야 한다.


인요가는 사람을 열린 텍스트로 본다. 펼쳐진 페이지처럼 바닥에 놓인 자신의 모습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바꾸고 만들어간다. 책장은 넘어가지만 책은 닫히지 않는다. 자세를 취하는 동안 줄곧 열려 있는 페이지에 누군가의 손길이 닿을 수도 있지만 그저 다른 해석일 뿐이다. 그 순간 아사나에 집중한 자기 자신만이 비로소 정렬에 가깝게 도달하지만 그 또한 언제든 변할 수 있고, 책이 닫히지 않는 한 다른 방법은 쌓여간다. 나는 이 방식을 볼 때마다 ‘결코 하나의 결정판을 갖지 않는 탈무드’가 떠오른다. 탈무드에서 하나의 말이 생성되기 위해서는 늘 대화자가 필요하다. 율법은 스승에서 제자로 구전되고 정답보다 해석의 여백이 중시된다. 이처럼 인요가의 정렬도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몸과 마음의 상태에 따라 끊임없이 다시 쓰이는 해석의 언어다. 탈무드가 신의 예지를 단일한 의미로 회수하지 않듯, 인요가의 정렬 또한 단 하나의 기준으로 환원될 수 없다.


자기만의 정렬이 옳고 맞다고 믿는 사람은 그 믿음이 스스로를 넘어지게 하기 전에 타인을 다치게 할 수 있다. 강한의지와 단단한 체력을 가진 그들은 빠르게 아사나를 완성할 수 있지만, 정작 그 속의 감각이나 관계성에는 무감할 수 있다. 몸은 반복을 통해 바뀌지만 사고방식은 익숙한 틀 안에 고정되기 쉽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이 세운 정렬이라는 경계를 기준 삼아, 타인의 몸을 판단하거나 지도하려 든다. 사방이 벽으로 막힌 방 안에서 오직 자기 발자국만을 따라 도는 여행자처럼. 그 안에서는 확신할 수 있지만 바깥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잊게 된다.


정렬은 객관적일 수 없기에 내 몸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를 전제로 한다. 아사나를 할 때 정렬을 생각한다는 것은 나의 몸과 내가 나누는 대화이다.


몸을 바라보는 내면의 시선

자세를 수정하는 섬세한 손길

그것을 편안하게 유지하는 다정한 감각

바람처럼 자유로운 호흡


통증이나 불편한 감각을 외면하지 않고, 그것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알아차릴 때 역설적이지만 타인의 감각과 통증에도 가 닿을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정렬이 질문인 것은 나의 몸과 타인의 몸이라는 어려운 문제 앞에 서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몸은 하나의 고유한 언어이며 어디서부터 읽어야 할지 막막한 지문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해석의 틀이자 우묵한 눈길로 타인을 들여다보기 위한 도구이다. 쉽게 풀리지 않는 문제 앞에서 포기하지 않기 위해 그 몸이 전하는 이야기에 오래도록 머물기 위해.

내가 바라보는 아사나와 실제 내 몸이 지금 할 수 있는 것 사이의 거리를 줄여주는 사다리이다. 그 사다리는 곧 다정한 이해이고, 기다림이며 나와 타인을 향한 지속적인 응시이다.


그러므로 모두를 위한 정렬은 없다.

각자의 몸과 마음 그리고 삶의 결에 따라 달라지는 흐름이 있을 뿐이다. 요가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정해진 정렬과 그것을 엄격히 고수하는 것이라면

요가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방법이란 우리가 별을 올려다볼 때의 시선이 올려다보는 각도와 비슷하다.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봐라'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스승이 소유한 기예와 사고가 아니라 우리의 스승이 그 스승을 올려다보았을 때 시선이 올려다본 각도이다.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보는 사람에게는 무한의 가능성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길이 보장된다.


keyword
토요일 연재
이전 05화하나도 부럽지가 않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