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그건 내가 만들었어요
사실은 '피드백이 가장 힘들었어요.' 두 번째 이야기되겠다. 또 사실은 피드백이라 쓰고 판단이라 읽으셔야 하겠다.
요가강사과정 후에 과정에 참여하는 강사들은 수차례 모의테스트를 거치고 테스트에서 수련을 담당한 강사의 티칭을 서로서로 피드백한다.
내가 하는 판단(피드백)이 상대에게 도움이 되는 말인지 수차례 고민해야 한다. 그러나 시간은 한정적이고 말속에는 내 안의 '내정간섭자'의 호불호가 반영되어 있다.
내정간섭자는 선호의 태도로 나를 그리고 타인을 감시한다. 감시와 관찰은 습관적인 패턴을 갖고 있다. 그것은 시간을 거쳐오며 사라지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이 경우는 성향이나 호불호라는 이름으로 강한 패턴을 형성한다. 이것은 물론 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강사들은 함께 수련하고 배우며 서로 마음을 나누는 사이가 되고, 가까워지기도 혹은 멀어지기도 한다. 이런 관계에서 가까운 이에게 하는 피드백과 거리감이 있는 강사에게 하는 피드백이 얼마나 다를지 한 번쯤은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아무렇게나 던진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잊는다면야 세상일이 이리 복잡하게 돌아갈 일도 없을 것이다.
기준점으로 삼는 것은 판단을 하기 전에 (강사들의 모의수련 과정을 보고 들은 후에) 그 멘트에 대한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내 마음의 내정간섭자'가 가장 좋아하는 놀이는 '귀인 오류'이다. 상황적 요인 같은 건 이미 기억에서 삭제되고
그동안 그 사람과 나눈 대화와 행동을 바탕으로 판단한 온갖 오류들로 비빔밥을 만드는 것. 비빔밥을 만든 후에는 탁월한 작명센스로 낙인까지 찍는다. ‘내 마음속의 저장’처럼 상대에게 '고정된 이미지'로 만든다.
귀인오류를 자각하는 방법이 있다. 피드백(판단)을 질문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상대의 답을 경청한 후에도 내 판단이 유지된다면 그때는 내 의견을 건네면 된다. 상대의 말을 통해 내 생각이 바뀌었다면 보고 들은 내용이 잘못되었음을 시인하면 그만이다.
판단을 유보하거나 잠시 멈추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나 이것으로 관계의 평화가 찾아온다면 필요한 도움을 효과적으로 건넬 수 있다면 해 볼만하지 않을까. 정말이지 밥 먹듯이 하는 귀인오류를 하지 않는 방법은 사실 어렵지 않다.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면 된다.
‘객관적이라는 말’은 이미 주관이 담뿍 들어가 있음을 모를 수 없다. 대안으로 사용하는 첫 문장은 ‘흐름상 보면’과 ‘회원의 입장에서 보면’, ‘지켜본 바로는’ 같은 표현들이다. 물론 이 문장들이 객관성을 담보해 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들은 ‘나는 이 위치에서 이렇게 보았다’는 것을 전제한다. '불완전한 시야임을 인정'한 표현일 수 있다.
경험을 기반으로 말하고 싶을 때는 “여러 상황을 겪어보니”라는 첫 문장이 있다. 본 요가원의 교육을 전적으로 담당하는 강사가 자주 사용하는 문장이다.. 몸으로 터득한 것을 삶의 이정표로 삼는 사람이다. 머물기보다는 늘 움직이는 사람 겪어본 것으로 근거를 만드는 사람 그래서 이 사람의 피드백에는 진정성이 느껴진다.
‘처음부터 좋은 것’과 ‘다짜고짜 싫은 것’을 중단하고 싶다는 건 에미에비와 자란 환경을 바꾸고 싶다는 것과 같을 수 있다. 귀인오류보다 더 무서운 선입견 되시겠다. 어휴!
귀인오류는 ‘왜 저럴까’를 해석하는 실수지만, 선입견은 ‘원래 저런 사람’이라고 박제해 버린다. 귀인 오류는 그 순간을 오해한 것에 불과할 수 있지만 선입견은 시간의 모든 층위를 통째로 덮어버리는 착각이다. 내 안의 내정간섭자는 말한다. “봐, 또 그럴 줄 알았다니깐.” 그 순간 나는 그 사람과 주변 상황은 안중에 없고, 이미 저장해 둔 이미지 파일을 꺼내 쓰고 있다. 더 무서운 건, 이 선입견은 그 사람을 지우는 데 그치지 않고, 내가 어떻게 관계 맺고 판단할지를 좌지우지하는 자동장치가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뇌에도 재부팅시스템이 있다면 좋겠지만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얘기는 접어두자.
‘판단중지(epoché)’를 알게 된 계기는 ‘가까운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 법’을 찾다가였다.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것은 오히려 사랑보다 품이 많이 드는 데다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장자의 물레의 비유를 보면 도자기를 만들 때 사용하는 물레는 흙덩어리와의 소통을 상징한다. 아름다운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 물레의 중심은 비워져 있어야 하고 비워진 중심부터 흙덩어리를 올려야 한다. 안 그러면 얹자마자 덩어리는 바깥으로 튕겨 나가기 때문이다.
비우고 판단을 중지한다는 것은 결코 편안한 상태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비움은 단순한 무無가 아니다. 빠르게 회전하는 물레처럼 비워진 중심은 강력한 역동성을 가진다. 그 역동성에 나를 맡긴다는 것은 수동적인 순응이 아니다. 판단을 멈추겠다고 결정한 주체가 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판단중지는 포기가 아니라 능동적 정지다.
타인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강한 바람 앞에 무방비로 서 있는 것과 같고 강물의 물살을 온몸으로 맞는 것과도 같다. 하지만 그 물살을 견디고 나면, 내 시야는 처음과 다르게 열려 있다.
비움은 곧 도추(盜取)다.
도추란, “나는 나다’라는 단단한 자의식도 한 번 내려놓는 행위다. 자기 내부와 타자의 외부 사이 어딘가, 경계선에 놓인 이 상태는 단순히 빈 것이 아니다. 태풍의 눈처럼, 폭풍 한가운데의 부동의 중심이다.
이 비움은 정적인 평온이 아니라, 기억을 벗어나고자 하는 치열한 투쟁이다.
판단이 지옥이 되지 않게 만드는 것은
맑은 물처럼 타인을 왜곡 없이 비추는 마음
여백을 기꺼이 남겨두려는 환한 마음
있는 그대로 비추되 태우지 않는
따뜻한 빛 같은 마음일 것이다.
- 위의 장자의 물레와 판단중지는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강신주 저]의 도서에 기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