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개 없는 계절

Friday Nocturne

by 요인영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순간

의미는 퇴색된다.

뿌연 거울 앞에서

좋아하는 것을 든 채 흐려지듯이.


대신 이렇게 말해 보는 것이다.

매주 금요일은 술요일이다. 불금이다, 하듯.

말 안에 소소한 행복과

기다림에 대한 보상의 의미를

담뿍 담아보는 것이다.


내게 금요일은 녹턴요일이고,

오후 네시는 커피의 시간이다.


이 문장에 호감을 느낀다면

완전히 같지는 않더라도

비슷한 리듬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랜 시간 종교 없이 지내다 보면

의식이 필요해진다.

금요일의 녹턴은 감상이라기보다는 의식이 되고,

매일 네 시의 커피는

내게 딱 맞는 밀도가 된다.


감정의 밀도를 조절하는 일은

커피의 맛과 향으로 가능하다.


예전에는 가끔, 요즘은 자주

‘이상하게 편하고,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에 욕심이 생긴다.


경계 境界를 지워주고,

경계 警戒를 지워준다.

녹턴이 흐를 때 경계는

나와 세계를 갈라놓지도

스스로를 움켜쥐게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내겐 한계(限界).

더 나아가지 않아도 되는 선,

무리하지 않아도 되는 지점.

통제가 아닌 허용의 경계가 된다.


녹턴은 감정이 증식하지 않도록 막아주기보다는

여기까지만 가도 충분하다고 알려주는 음악이다.


녹턴이 만드는 경계는 차갑지도,

긴장되지도 않은 선율이다.

그래서 다정하고, 음악과의 관계에 욕심이 생긴다.

그 다정함은 의식이 되고, 밀도가 되어

금요일의 밤에게 기꺼이 손을 내밀게 한다.


커피와 혀의 관계처럼.

혀가 위상을 전환하여 말을 내뱉지 않는 이상

그것은 둘만의 관계로 남는다.

녹턴은 밤을 설명하지 않는다.

네 시의 커피가 딱 알맞은 밀도로 나를 제자리로 돌려놓듯이

금요일의 녹턴은 밤에만 드러나는 밀도를 건드린다.

전개가 없는 책처럼 시간을 옆으로 펼쳐놓는다.

나른해진 시간 안에서 비스듬히 눕게 된다.

끝이 나지 않아 정리할 필요가 없는 상태로

가라앉음이 허용된다.


녹턴은 말하지 않음으로 말하는 태도를 연상시킨다.

모든 것을 말하는 것보다

설명하지 않음으로 완성되듯

녹턴은 완결하지 않음으로

그것을 알려준다.


꾸준히 반복되는 왼손과

망설이는 오른손의 패턴은

어디에도 설 수 없어

경계에 선 채 머뭇거리는 사람을 연주하는 듯하다.

낮과 밤 사이,

선택의 기로에서 끝내 /엇나가는/ 몸처럼.


녹턴은 엇나감을 교정하지 않는다.

리듬이 비슷한 관계처럼

그냥 같이 있어준다.


멍하니 앉아 있든,

생각의 흐름에 휩쓸려 있든

의식을 강제하지 않는다.

흐름이 곧 허락임을 알게 해준다.


전개 없이 흘려보내기에 알맞은

녹턴의 시간,

1시간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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