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자 Aug 11. 2022

덜덜덜. 물 붓고 다시 하면 그만이지 뭐.

밥이 설익었다. 나처럼- 밥은 망했어도 인생은 살아진다.

오늘의 밥도, 또 실패입니다. 

오늘의 밥도, 또! 실패입니다.


어제는 밥솥에 물을 너무 많이 넣어서 죽-밥이 되었다. 반대로 오늘은 물을 덜 넣었더니 딱딱하다. 설익었다. 전기밥솥과 함께 산지 10년쯤 되었으면 눈 감고도 찰진 밥을 떡- 하니 완성해낼법도한데, 나에게 밥솥은 로또 같다. '드럽게 안 맞는다.' 밥 물, 참 못 맞춘다. 


그까짓 거, 쌀컵으로 계량해서 넣고, 내솥의 눈금만 맞춰서 물 부으면
쉬운 거 아냐?


지나가던 밥의 신들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말투로 한마디 툭- 던진다. 


그러게요, 저에는 그 쉬운 게 참 어렵네요.


굳이 큰 감정의 동요 없이 나 역시 한마디 툭- 던지고 만다. 


조금 더 마음이 어렸더라면 '아니, 그게 아니라... 어쩌고 저쩌고.' 세상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우리 집 쌀통의 계량기는 쌀이 다 떨어질 때쯤에는 양이 정확하게 나오지 않고 들쑥날쑥하다, 쌀 컵을 쓰기에는 귀찮다 등등의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곤, 집에 와서 씩씩- 거렸을지도 모른다. 


'나, 아니야. 나 그런 것 아니야, 나 힘든 것 아니야.'라고 박박 우기는 것보다 '그래 맞아. 그러네. 근데 뭐? 왜? SO What?'이라고 인정하면 감정의 곡선 리듬이 평온해진다. 늘 잘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고, 완벽하지 않음을 쿨하게 인정하면 치열한 삶이 아니어도 충분히 평온하고, 충분히 안정적일 수 있음을 즐길 수 있게 된다. 


우리 집 쌀통도 처음에 샀을 때는 참 정확했다. 버튼을 돌리기만 하면 알아서 정량대로 딱딱- 원하는 만큼의 쌀을 척척- 내어주더니 이제는 안쪽의 부품이 고장 났는지, 한 번 손을 봤음에도 쌀통의 양이 바닥날 때 즈음에는 평소보다 더 적은 쌀만 내어준다. 


하긴 쌀통도 나이 들었으니 자기도 힘들겠지, 저 쌀통 녀석의 매너리즘인지,
쌀테기인지 모를 발악을 그냥 눈감아주고, 끌어안고 살아주자.
새것으로 사긴 뭘 사. 그냥 끌어안고 대충 같이 살자.  


설익은 밥을 주걱으로 휘휘 저으며 혼잣말을 한다. 쌀통조차 가엽다. 나 같아서- 


한때는 나도 참 또랑또랑했는데 어느 순간 한 번 마음이 고장 난 이후로는 고쳐 써도 예전만 하진 않다. 웃다가도 눈물이 나고, 신나게 수다를 떨고 집에 와서는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한 순간에- 땅이 꺼질 듯, 시무룩해지기도 한다. 그러다 어느 날에는 한참 텐션이 올라 우샤인 볼트처럼 밤새워 일을 하는 열정을 뿜어내다가도, 고장 난 전기밥솥처럼, 부품 빠진 쌀통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드러눕는다. 




참 애썼다.


끝내 버티지 못할 것 같은 예감에 새벽잠을 설친 순간을 기어이 이겨 내며 우린 참 치열하게 달려왔고, 달려가고 있다. 나는 이제 안다.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야 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에 지쳐, 당신에게 눈물 차오르는 밤이 있음을...(중략)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뛰어갔지만 끝내 가 버리던 버스처럼 늘 한 발짝 차이로 우리를 비껴가던 희망들. 그래도 다시 그 희망을 좇으며 우리는 그렇게 살았다. 당신 참 열심히 살았다. 사느라, 살아내느라, 여기까지 오느라 애썼다.
-어쩌면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 정희재, 작가의 말 중-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밥은 망했어도 글은 써진다. 밥이 설익었다면 물 조금 더 붓고 다시 하면 된다. 죽이 되어버렸다면 다음에는 물을 좀 덜 넣으면 된다. 밥은 언제고 또 할 수 있다. 밥 물 좀 잘 못 맞췄다고 인생, 크게 문제 되지는 않는다. 달리다가 넘어지기도 하고, 숨이 차 옆길로 빠져 잠시 쉬어간다 해도 나는 그대로 나다. 멈춰 섰다가도 다시 일어나 걸으면 되고, 언젠가는 다시 뛸 수 있는 힘도 생긴다. 내 인생은 지금도 계속 진행 중이다.  


덜덜덜. 밥이 설익었다고 떨지 말자. 기대도, 고민도, 마음의 파도도 조금만 덜어내면 다른 곳에서라도 내 인생의 맛깔스러운 맛은 결국 찾아내진다. 


어쩌면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 괜찮다. 애썼다. 당신도 애썼다. 나도 애썼다.




<반창고 생각> 여러분의 마음에 문장으로 반창고를 붙여드립니다.

밥은 망했어도 솟아날 글은 있다. 밥은 망했어도 인생은 살아진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