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한 자기돌봄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이 벌써 열흘이 넘게 연체되었다.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 되자는 신정의 다짐이 구정쯤 스러져버렸다. 완전히 내 탓은 아니라 변명하고 싶다. 설연휴에도 부득이 일을 하느라 이렇게 되고 말았을 뿐이라고.
로펌을 나오면서는 절대 주말이나 연휴에 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금요일 퇴근하는 그 순간 이메일과 메신저 알람은 당연히 끈다. 하지만 그런 신념과 스킬에도 불구하고, 휴일이나 휴가에도 일을 해야하는 때가 꼭 있다. 내가 왜 못 쉬고 이러고 있나 잠깐씩 돌아보면 거의 사법기관이나 규제기관과 일을 하는 경우였다.
기관의 선생님들은 정말 넓은 이슈를 다루기 때문에 우리 사업을 잘 모른다. 기관 선생님들께는 바로 소화할 수 있도록 1부터 10까지 씹어서 떠먹여드려야 한다. 게다가 이 선생님들은 이미 편향된 시각을 가지고 접근을 할 가능성이 높아서, 재빠르게 눈치를 보다 요리조리 방향을 틀어가면서 설명해야할 때도 많다.
예컨대 소개팅에서 우리팀 A군을 어필한다고 하자. 우리는 A군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안다. 선한 심성과 준수한 사회인으로서의 모습, 잠재력까지도 줄줄 읊을 수 있다. 하지만 소개팅에는 완고하다고 소문이 자자한 소개팅녀의 어머니가 나온다! 이미 A군을 양아치로 오해하고 있는 그녀의 어머니에게, A군이 얼마나 멋진 청년이고 허튼 생각이 없는지 설득하기란 보통 일이 아니다.
그런 소개팅, 아니 외근을 하고 오면 진이 쭉쭉 빠진다. 돌아오는 택시에서 내릴 때쯤 기사님이 한마디 하신다. "엄~청 피곤하신가봐요~". 저런, 엄청 큰 소리로 하품을 하고 있던 걸 그제서야 알아챘다. "주말엔 아주 푸욱 쉬셔야것어요." 기사님의 위로 덕에 그제서야 긴장을 내려놓았다. 왠지 고마워서 카카오택시 리뷰에 별점 5점을 남겨드렸다.
분명 쉴 기회는 있었다. 설 연휴도 있었고, 3월이 시작될 때도 연휴가 있었다. 그러나 온전히 쉬지를 못했다. 일생각에 여행지의 풍경이 흐려지고 같이 여행한 파트너와의 대화에서 종종 유체이탈을 했다. 숙소 침대에 누워있을 때도 닥치지 않은 일에 대한 우려가 스멀스멀 덮쳐왔다. 이건 어떤 과부하의 신호다.
업무로 인한 부하의 최고점을 10이라고 한다면, 지금 8점 후반대까지는 왔다. 이 정도면, 워라밸을 외치던 사회 초년생 시절엔 휴식 시간을 통으로 날렸을 것이다. '주말에 일 생각을 하다니, 얼른 지워!'하며 더 많은 번뇌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때 인생에 회사가 차지하는 지분이 너무 커서 그랬던 것 같다.
비로소 회사 생활 만 10년을 향해 가는 지금은 어느정도는 끊어낼 줄 아는 지혜가 생겼다. 회사 생활이 충분히 익숙하고 업무도 손에 익어 그런가, 일 생각이 나는 그 자체로 스트레스를 크게 받진 않는 걸 보면 스스로가 기특하다. 특히 어차피 해결되지 않는 일들, 기한이 임박한 일들은 '생각'한다고 '걱정'한다고 하여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 안다.
요즘의 문제는 일 그 자체로 오는 몸과 마음에의 스트레스가 잘 꺼지지 않는 것이다. 금요일 저녁에 부하 스위치가 '오프'되지 않고 주말까지 이어진다. 돌아보면 그 밤 택시에서 내릴 때 완전한 숙취 수준이었다. 어떻게 씻고 잠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고, 그 다음날 몸을 두드려 맞은 것처럼 기력이 없었다.
보통 피곤하고 무기력할 때 쇼츠를 몇 시간씩 본다고 하지만, 이 상태가 되면 유튜브도, 릴스 숏츠도 피로감에 볼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이건 코티솔 경보 수준이다. 지금은 그 어떤 화면도 보지 않고 호흡과 명상을 할 때다, 하고 누워서 거친 한숨을 몇 번을 몰아내쉬며 진정을 시도했다.
그런데 이번엔 역부족이었다. 얼른 타이레놀을 찾아 먹었다. 그리고 부하를 낮추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써내려갔다.
그래, 먼저 산책을 해야겠다. 산책을 할 땐 휴대폰을 놓고 가야만 한다. 꽃샘추위에 아직 코가 시립지만 해가 화창해서 좋았다. 집 주변에 천변이 있는 게 참 다행이다. 봄이 다가오면서 공원에 나와 걷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예전에 걸어보지 않았던 길을 걸으면서 흐르는 물 소리를 들었다. 벚나무는 아직이지만, 매화나무와 산수유 나무에 봉오리가 맺힌 것을 보았다. 동네 어르신들처럼 나무 아래 벤치를 차지하고 멍하니 앉아있었다. 여전히 희미하게 일 생각이 난다. 그럴 땐 '생각이 나네...'하고 물에 흘려보내면 된다. 다시 걷고싶어질 때까지 가만히 앉아있었다.
한참을 걷다보니 예전에 별표를 해둔 카페가 보여 들어갔다. 디카페인 커피를 한 잔 시키고, 휴대폰이 없으니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가만히 들으면서 창가를 바라보았다. 머릿속에 잔뜩 떠다니던 부유물들이 조금씩 조금씩 내려앉는 것 같았다.
다시 한참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는데 기분이 좀 나아진 게 느껴졌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점심밥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인지 과부하를 낮추는 다른 방법으로 손을 쓰는 단순한 일을 하면 좋다고 하는데, 내가 그래서 집밥하는 걸 좋아하나보다. 집안일은 내게 노동이 아니라 힐링이다. 양파, 당근을 다듬고 썰고 물을 보글보글 끓이다보면 생각이 없어진다. 갓 지은 밥을 차려가족과 맛있게 먹는 것은 또다른 기쁨이 된다.
꽤 오래 회사 생활을 했지만 영원히 익숙해지는 것은 없나보다. 일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모습을 바꾸어 계속된다. 앞으로도 쏟아지는 일이 많고 컨트롤하기 어렵겠지만, 너무 무력해지지 말자고 다짐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자기돌봄의 지혜는 분명히 쌓여 왔다. 많은 경우 누워있기보다 집 밖으로 나갈 때 나아졌다. 집 안에서도 소파에 파묻혀있기보다는 움직일 때 몸과 마음이 가뿐해졌다.
유독 춥고 길게 느껴진 겨울도 드디어 끝나간다. 곧 봄은 올 테고, 움직이기 좋은 날이 더 많아진다. 삶의 작고 큰 부하를 걷어내는 나만의 노하우도, 반복되는 계절만큼 조금씩 늘어날 거라고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