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이 아픔에서 건져 주십시오
그런데 이거, 건져내질 수 있는 아픔인건가요
참 이상한 12월이었다. 베프 2명이 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졸지에 고아가 되었다. 이게 대체 꿈인가요 싶었던 12월.
나를, 그리고 내 친구들을 압도하는 충격적인 경험 앞에 나는 무력했다. 내가 아무리 놀라고 슬프다한들 부모님을 잃은 친구들보다 더 슬플 수 있을까. 슬픔도 내 몫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상주들 앞에서는 절제하고 또 절제했다. 시편 25:16~17절을 외고 또 외웠다.
주님, 나를 돌보아 주시고,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나는 외롭고 괴롭습니다. 내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고, 나를 이 아픔에서 건져 주십시오.
지금 이 시간 고통받는 나의 친구들과, 한 부모님 아래에서 나고 자란 형제들을 위해 저 말씀에 그들의 이름을 넣어 기도해왔다. 그 밖에는 정말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주님, 이게 대체 우리가 건져질 수 있는 수준의 아픔인가요? 건져지기는커녕 집채만한 파도를 맞은 것처럼 휩쓸려 내려가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의 아픔 아니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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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이 돌아가신지 2주가 된 친구는 나에게 '천국은 있는거야?'라고 물었다. 곱씹어 생각할수록 참으로 슬픈 질문이다. 작별 인사도 없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게 되신 부모님의 안위를 생각하며 나온 질문임을 알기에.
살아있는 사람 중 천국을 명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바울의 표현처럼, 우리가 지금은 그저 '희미한 거울에 비춰 보듯이' 추측하거나 기대할뿐.
나는 천국이 없더라도 내 신앙을 유지할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천국이 없더라도, 내가 사는 이 삶에서 얻은 구원이 족하기 때문에. 끝없는 허무 가운데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헤매이던 와중에, 복음을 통해 나는 삶이라는 특별한 편도 여행 기회를 누린 후 삶의 마지막 날 '주님, 나에게 시키신대로 맡기신 일들을 하고 맡기신 사람들을 돌보며 열심히 살다 왔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을 꿈꾸게 되었다. 그 이후 나라는 존재는 바람에 흔들리는 풀이나 민들레 홀씨 같은 것이 되어 무의식의 세계로 영원히 잠든다 하더라도, 이것은 나에게는 실로 충분한 구원이었다.
그러나 이는 어쩌면 나와 내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직' 살아있기에 가능한 고백 아니었을까?
사랑하는 사람들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상황 가운데, 나는 여전히 천국이 없어도 내 구원이 이것으로 충분하다 고백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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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우리가 건져내질 수 있는 수준의 아픔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니, 나와 내 친구들의 관계는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해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는 자신을 세상에 나게 하고 키워주신 부모님 없이 세상을 헤쳐가야 하는 친구들에게 나는 인생의 마지막날까지 함께 갈 가족이 되고 형제가 되어주리라. 건져내질 수 없는 슬픔 가운데, 이 슬픔에 떠밀려 내려가지 않게 여러 가닥의 단단한 줄을 꼬아 내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