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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향 May 20. 2024

[불맞말 01] 이 불안은 내 것만이 아니다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농업혁명 덕에 미래는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농부들은 언제나 미래를 의식하고 그에 맞춰서 일해야 했다. 농업경제의 생산 사이클은 계절을 기반으로 했다. 몇 개월에 걸쳐 경작을 하고 나면 짧고 뚜렷한 수확기가 뒤따랐다. 풍성한 수확을 모두 끝마친 날 밤 농부들은 마음껏 축하를 할 수 있었지만, 그로부터 한두 주일 이내에 다시 새벽에 일어나 들판에서 온종일 일하는 일상으로 돌아갔다. 식량은 오늘, 다음 주, 다음 달 먹을 것까지 충분했지만 이들은 다음 해와 그다음 해 먹을거리까지 걱정해야 했다. (......) 그 결과 농업의 도래와 함께 비로소 인간의 마음속 극장에서 미래에 대한 걱정은 주연배우가 되었다.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는 수렵 채집인이었던 인류가 약 1만년 전 농업혁명을 겪으면서 불안을 겪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밭에 밀알 씨앗만 심은 게 아니라 마음에 불안 씨앗도 심은 셈이다. 수렵 채집을 하는 입장에서는 내가 내일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점이 역설적이게도 불안과 걱정을 덜어준다. 두려워해봐야 무슨 의미람? 먹을 것이 떨어지면 사냥을 나서거나 숲에 가서 버섯을 따오거나 나무에 열린 열매를 따오면 된다. 


떠돌아다니는 삶의 불안도가 더 높지 않을까? 사자를 만나면 어쩌지? 질병에 걸리면 어쩌지? 그러나 이것은 현대인의 관점이다. 막상 그 삶 한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미래를 그리지 않기 때문에 굳이 걱정하지도 않는다. 이도저도 안 되면 다른 땅으로 떠나면 그만이다. 많은 계획을 세울 필요가 없다. 정확히 말하면, 세워도 소용이 없다.


그러나 농업 사회가 시작되면서 많은 조건들이 달라졌다. 분산투자식인 수렵채집 대비 농사는 집약적이다. ‘올해 농사가 잘 되느냐 못 되느냐’라는 한 가지 기준이 삶의 질을 압도적으로 좌우한다. 더 많은 씨를 뿌리고 더 많은 곡식을 수확하기 위해, 농부가 고려해야 할 사안들이 늘어난다. 비가 제때 와야 하고, 햇살이 적당히 비춰야 하고, 들짐승들을 막아야 하고, 폭풍우가 몰려오지 않아야 한다. 


제일 중요한 점은, 머무는 삶은 이곳이 아닌 대안을 삭제한다는 점이다. 수렵 채집인처럼 이 땅을 버리고 쉽게 다른 땅으로 떠날 수 없다. 그 많은 살림살이를 들고 어디로 간단 말인가? 새 땅을 찾아서 또 어느 세월에 개간을 한단 말인가? 이곳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 덕에 인간은 내일을, 다음 계절을 걱정하게 된다. 


그렇게 본다면 불안은 이미 1만년 전, 인간이 머물러 살기를 결정한 순간부터 내 몸에 새겨진 DNA이다. 인간이 미래를 상상하고 대비하는 능력을 갖춘 한, 불안은 마치 속옷처럼 몸에 입혀져 있다. 내가 지금 느끼는 불안은 온전히 나의 것만은 아니다. 온 인류가 땅에 정착하기로 마음먹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순간부터 결정된 것이다


이건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전해져온 아주 오래된, 전설 같은 신화 같은 이야기야........


그렇게 생각하면 몸에 찰싹 붙어 있는 이 불안이 무겁고 까끌하기만 하지는 않는다. 나 혼자만 입고 있는 옷이 아니니까. 저 겉옷을 벗으면 누구나 입고 있는 옷이니까. 옷에 달려 있는 태그 하나를 떼어낸 기분이 든다. 


숨을 크게 쉬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비가 올까 안 올까를 걱정하며 하늘을 올려다보던 오래된 사람을 떠올린다. 그 사람을 생각하면, 조금 덜 외로워진다. 긴 숨이 빠져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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