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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향 May 30. 2024

[불맞말] "세계가 크다는 사실이 구원이 된다"

<멀고도 가까운>, 레베카 솔닛


세상이 크다는 사실이 구원이 된다. 절망은 사람을 좁은 공간에 몰아넣고, 우울함은 말 그대로 푹 꺼진 웅덩이다. 자아를 깊이 파고들어 가는 일, 그렇게 땅 밑으로 들어가는 일도 가끔은 필요하지만, 자신에게서 빠져나오는 일, 자신만의 이야기나 문제를 가슴에 꼭 붙들고 있을 필요가 없는 탁 트인 곳으로, 더 큰 세상 속으로 나가는 반대 방향의 움직임도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양쪽 방향 모두로 떠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며, 가끔은 밖으로 혹은 경계 너머로 나가는 일을 통해 붙잡고 있던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일이 시작되기도 한다. 이것이야말로 말 그대로 풍경 안으로 들어온 광활함, 이야기로부터 당신을 끄집어내는 광활함이다. 

- 『멀고도 가까운』, 레베카 솔닛




남아메리카 페루에는 고대 잉카의 고산도시 마추픽추가 있다. 1400년대 후반 지어진 이곳은 일반적인 도시라기보다는 황제의 개인용 별장 혹은 임시 대피소였을 거라 추측된다. 1530년대 버려지고 잉카 제국이 멸망한 이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마추픽추는 완전히 잊혔다. 1911년이 되어서야 미국의 고고학자 하이럼 빙엄 3세가 재발견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어릴 때에는 먼 곳 저 너머가 궁금했다. 누군가는 우주에, 누군가는 공룡에, 누군가는 그리스 로마신화나 삼국지에 빠져든다. 어린이와 청소년 시절 나는 고대 문명에 심취해 있었다. 낙타를 타고 이집트 피라미드 앞에서 모래바람을 맞고 싶었다. 서안의 진시황릉에 가서, 표정이나 복장이 하나하나 다르다는 병마용들을 두 눈으로 보고 싶었다. 세상에서 제일 높은 호수라는 티티카카 호수에서 갈대로 엮은 배를 타보고 싶었다. 


아버지가 선물해준 『신의 지문』이라는 책을 읽으며 처음으로 마추픽추를 알게 되었다. 해발 2437m에 숨겨진 석조 도시의 흑백 사진을 보는 순간, 안데스 산맥의 서늘한 바람이 후욱 불어왔다. 콘도르를 탄 듯 하늘 위를 날며, 바람을 타고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면도칼 하나 들어갈 틈 없는 정교한 돌담 사이로,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노랫말처럼 들려왔다. 


중간고사 수학 성적이 몇 점 나올지에 불안해하는 열다섯 살,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을까 초조해하던 열여덟살. 한 팔 너비도 안 되는 책상 앞에서 납작해지고 부스러질 때마다 그 곳을 떠올렸다. 인종차별적 농담을 하며 킬킬대는 백인들을 뒤로 한 채 못 들은 척 버스에서 내리던 스물두 살, 자소서를 쓰며 손톱을 물어뜯던 스물세 살, 헤어지자는 남자친구를 붙들고 엉엉 울던 스물네 살에도.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지갑에 간직해둔 애인 사진처럼 마추픽추를 꺼내들었다. 


빛나는 도시를 지을 수 있는 제국이 있었다. 휘황찬란한 도시도 어떤 이유로든 버려질 수 있다. 거대한 제국도 넘어지는 순간이 온다. 그리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잊혔던 도시는 우연한 계기로 재발견되기도 한다. 빛나는 비밀 도시를 스쳐간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를 떠올리면 조그마한 숨구멍이 생겼다. 너무 전전긍긍하지 말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생각보다 많지 않을 수도 있어. 


스물네 살에 입사한 회사에서는 10년 근속하면 최대 3달까지 장기 휴가를 낼 수 있었다. 동기들 모두 그때 뭐할까를 이야기하며 회사 생활을 견뎠다. 나의 목적지는 단 한번도 변함없이 마추픽추였다. 서른세 살이 되는 첫 날에 페루 리마행 항공권을 끊어야지. 쿠스코에서 열차를 타고 아구아스 칼리엔테스에 도착해 마추픽추에 오르는 버스를 타야지. 온 세계 말이 바글거리는 곳에서 새벽 운무가 걷히기를 함께 기다려야지. 산봉우리에 둘러싸인 오래된 도시의 전경이 마침내 한 눈에 들어오겠지........


하지만 스물넷의 유진은 알지 못했다. 서른셋의 유진은 이미 한 아이의 엄마였고 막 둘째를 낳았다. 두 아이를 돌보다 빵이나 과자로 끼니를 때우기 일쑤였고, 3개월 출산 휴가는 1년 육아휴직이 되었다. 그리고 결국 회사를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10년 장기 휴가는 육아휴직의 연장이 되어버렸다. 장기 휴가 신청서를 제출했던 날, 아기 옷을 개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콘도르도 독수리도 아닌 비둘기 한 마리가 푸드득 날아올랐다. 그마저도 부럽던 시절이었다. 


마추픽추의 꿈을 내 손으로 접어 서랍 속에 넣으면서 어른이 된 것도 같다. 사탕 하나가 목에 걸린 것 같아 한동안 캑캑대 봤지만, 사탕은 녹지도 내려가지도 않고 꽤 오래 목에 걸려있었다. 뭘 잘못 주워 먹은 걸까. 무얼 미워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무언가가 몹시 미웠다. 세상 담벼락마다 스프레이를 뿌리고 도망가고 싶던 중학교 2학년 소녀처럼, 미움으로 가득한 시간이 오래도록 흘러가다가 옅어지고 스러져갔다. 



가끔은 그곳을 생각했다. 설거지를 하다가 문득. 세탁기를 돌리다 불쑥. 거실 형광등을 끄면 설핏. 그렇게 그릇을 씻고 빨래를 하고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들이 쌓여 가면서, 슬프지 않게 그곳을 떠올릴 수도 있게 되었다. 


마추픽추의 꿈과 바꾼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불가능해 보이기만 했던 일들이 하나씩 가능해졌다. 아이들을 두고 작업실에 가는 것도, 함께 해외에 나가 뚜벅이 여행을 하는 것도, 남편과 둘만 산책을 나가는 것도. 아마 몇 줌의 시간이 더 지나고 나면 육아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시간이 다시 가까워오고 있다.


그러나 나를 기쁘게 하는 건 마추피추에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니다. 비둘기마저 부럽던 길고 어두운 시간 동안에도 내가 꿈을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대충 접어 봉투 속에 봉해두긴 했지만, 구겨서 버리거나 태우지 않고 간직해 왔다는 것.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것. 생이 끝나는 마지막까지 가지 못하더라도 나는 영영 그곳을 생각하며 행복할 수 있다는 것. 


마추픽추, 마추, 픽추, 마, 추, 픽, 추. 두 번이나 입이 동그랗게 오므리며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마법 주문을 외우는 기분이 든다. 번성하고 쇠락하고 사라지고 재발견되는 도시의 운명처럼, 내 인생의 어떤 시간들이 지나갔다는 것에 길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또 어떤 시간이 굴러오고 있다는 것을 예감처럼 감지하면서.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는 것이, 그곳이 아주 멀리 있다는 것이, 그래서 쉽게 떨쳐 일어나 갈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이 위로가 된다. 그곳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날개를 펴고 아주 오래된 시간을 건너갈 수 있을 기분이 든다. ‘세계가 크다는 사실이 구원이 된다.’ 아등바등 전전긍긍하던 일들이 잠시잠깐 멀어진다. 콘도르를 타고 마추픽추를 내려다보던 15살 그 시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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